한 곳에서 2주 정도 머무르게 되면 일상의 감각이 생긴다. 평균적 날씨를 알게된다. 동네라는 개념도 생긴다. 지하철 역에 내리면 ‘이제 집‘이라는 실감이 오른다. 들렀던 곳에 또 간다. 지도를 보지 않을 때 주어지는 자유에 감각이 열린다. 그래서 많은 곳을 다니지 않는다.
몇 차례 필름사진기를 들고 나섰지만 찍은 건 딱히 없다. 비가 내린다. 색들이 어깨를 맞추기 시작한다. 비 오기 전 사람이 도심의 배경이었다. 빗줄기 사나워진다. 이제는 건물과 상점이 도심의 배경으로 뭉게진다. 사람이 도드라진다. 오랜만에 핸드폰을 들어 영상을 찍었다. 우산을 쓴 커플이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한다. 두 사람은 각자 우산을 쓰고 있다. 남자는 훨씬 키가 크다. 여자는 우산 아래 있다. 남자는 뒤에 있다. 여자가 우산을 살짝 뒤로 떨군다. 얼굴을 내민다. 미소 짓는다. 고개를 까딱인다. 이제 가자는 신호. 남자는 따라나선다. 이런 장면이 담겼다. 우산은 로맨틱한 소지품이다. 열리는 곳에 마음이 있다.
다큐멘터리에도 코미디가 있을까. 찾기 힘들다. 다큐멘터리는 논픽션에 기반하기 때문에 그 속성에 따른다. 나의 삶, 나와 관련된 사물이나 사건이 웃음 소재로 활용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다큐멘터리 감독은 극영화 감독보다 훨씬 뾰족한 도덕적, 사회적 잣대를 마주해야 한다. 논픽션이라 그렇다. 코미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다면 드높은 용기와 드넓은 관용이 요구될 것이다. (그렇다고 코미디 다큐멘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엄청 많다. 언젠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적어보겠다.) 그래도 블랙코미디는 가능하다.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는 저녁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며 볼 수 있는 유쾌한 블랙코미디 다큐멘터리다. 뱅크시가 연출했다. 연출만 했다.
주인공 ‘티에리 구에타’는 프랑스 출신으로 로스엔젤러스에 살고 있다. 구제숍을 운영하며 제법 벌이가 괜찮은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캠코더를 손에 얻는다. 그후로 계속 찍어대기 시작한다. 그러다 길거리 예술가들에게 흥미가 끌리고 무턱대고 몇년 간 따라다니며 촬영한다. 그렇게 뱅크시를 만나게 된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구에타의 푸티지는 그래피티 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피티 역사의 시작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휘발성 높은 길거리 예술 행위가 그의 카메라에 기록돼 있었다.
뱅크시는 첫 전시에서 성공하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구에타에게 수년 간의 푸티지로 다큐멘터리를 완성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의 연출은 구에타가 아니라 뱅크시다. 그럼 구에타는 뭐하고 있었을까. 그는 예술은 ‘세뇌'라며 ‘미스터 브레인워시 Mr. Brainwash’라는 작가명으로 첫 전시를 준비한다. 그는 이전에 한번도 예술을 해본 적이 없다. 본 적은 많다.
혹자는 뱅크시 ‘티에리 구에타’가 수년간 찍어온 푸티지로 연출만 함으로써 그의 작업을 훔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티에리 구에타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 예술을 예술로 보게 하는 것일까. 특히 현대미술에서 예술에 대한 정의는 골치가 아파지는 주제다. 그러나 치킨을 시키고 편안히 보자. 인터뷰에 직접 ‘등장’하는 뱅크시는 시종일관 영국인스럽다.
금주의 음악 앨범
오늘의 아침 음악
by 모호
트랙리스트
1. 'S Wonderful 2. Estate 3. TinTin Por Tin Tin 4. Besame Mucho
5. Wave
6. Caminhos Cruzados
7. Triste
8. Zingaro
앨범 Amoroso
아티스트 João Gilberto
발매 1977
길이 45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아침 음악을 고르는 건 신중해야 할 일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날의 기분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요즘처럼 기분 좋게 쌀쌀한 날씨의 아침에 자주 고르는 앨범이 있다. 바로 João Gilberto의 Amoroso다.
아침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른 시간에는 집중력도 떨어지고 배도 고프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양껏 먹었다간 종일 속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아침들이 있다. 일출을 촬영하는 아침들. 찍어야만 하는 시간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전남 장성의 장성댐에 자주 간다. 할머니의 고향을 집어삼킨 장성댐. 작년 여름, 아침의 댐을 촬영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장비를 챙겼다. 촬영하러 가는 길은 즐겁다. 동시에 괴롭다. 날이 아주 맑은 여름 아침이었다. 반팔 티셔츠 위로 아직 덥혀지지 않은 바람이 불었다. 삼각대를 짊어지고 바위 위를 뛰어다녔다.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침의 댐은 새파랬다. 파도처럼 물이 들이쳤다가 도로 빠졌다. 조금씩 밝아져왔지만 떠오르는 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침반을 확인했다. 내가 자리 잡은 곳에서는 해를 볼 수 없었다. 삼각대를 펼치고 카메라를 고정했다. 조금씩 밝아져가는 댐에 카메라를 대고 숨을 죽였다. 나는 곧 카메라의 작은 화면에서 눈을 떼고 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고 괴물 같은 푸른 물이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려버렸다. 따스하지만 외로운 멜로디. 편지 같은 멜로디.
시간과 기온은 기억과 음악을 떠오르게 한다. 내일도 아침 일찍 촬영을 가기로 했다. 모호순이 발송되는 날이 바로 그날이 되었으니. 아마 내가 자주 기억하고 감각하던 시간과 기온의 아침일 것이다. 그렇지만 찍어야만 하는 시간. 'S Wonderful을 들으며 아침 지하철을 타야겠다.
['S Wonderful]
Wonderful, marvelous You should care for me! Awfully nice, it's paradise How I long to be You make my life so glamorous You can't blame me for feeling amorous! Wonderful, marvelous That you should care for me! Wonderful, marvelous You should care for me! Awfully nice, it's paradise How I long to be You make my life so glamorous You can't blame me for feeling amorous! Wonderful, marvelous That you should care for me! Wonderful, marvelous You should care for me! Awfully nice, it's paradise How I long to be You make my life so glamorous You can't blame me for feeling amorous! Wonderful, marvelous That you should care for me!
금주의 사진
누워서 하늘
by 모호
대학에 다닐 시절, 학교에는 꽤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당시에는 날이 좋은 낮이면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사교성이 좋지 않은 나도 몇 번쯤 그곳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수건돌리기 같은 게임을 했었나. 마셨던 막걸리가 장수 막걸리였던지. 제대로 기억하는 바가 없지만 그날에 보았던 하늘을 기억한다. 다음 수업에 들어가기 전 잔디에 잠깐 누웠을 때 본 하늘.
하늘을 보는 건 쉽다. 고개를 들면 된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오래, 면밀히 바라볼 수 없다.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하늘을 보면 하늘을 자세히 보게 된다. 구름의 움직임과 하늘의 껍질들까지. 매일 언제나 하늘이 있지만 나는 하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다. 하늘은 '무한대의 넓은 공간'. 가늠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가늠해 보는 데에 나는 재주가 없다.
사진은 한강에 누워 본 하늘이다. 날이 풀려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아무렇지 않게 누워있었다. 나도 겉옷을 벗어 덮고 조심스레 누웠다. 하늘이다. 하늘이네. 나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언젠가 하늘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이 글은 하늘에 대한 글이 아니다. 역시, 하늘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