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다. 꽃이 피고 햇살이 부드럽다. 벌써 여름을 빌려오는 날들이 이어진다. 가끔은 겨울을 빌려오기도 한다. 봄은 빌려오는 계절. 그 중심에서 혼란스러워 하며 건조한 얼굴에 수분 크림을 바른다.
모호순은 어느덧 10호를 맞았다. 엊그제는 그간 적어온 글들을 찬찬히 읽었다.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글도, 그렇지 않은 글도 있다. 목요일만 되면 미처 적지 못한 모호순 글이 떠오른다. 글을 써야지, 읽을 만한 글을 써야지. 매번 다짐하지만 거듭 나는 나에게 실망하곤 한다. 매주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임을 실감한다. 일주일을 온전히, 그리고 예민하게 보내기에 나는 종종 지쳐있고 과할 정도로 걱정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매주 글을 쓰고, 읽어주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메일함에서 글을 꺼내 읽는 수고를 기꺼이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가끔 나는 이를 떠올리며, 또 곱씹으며 한주간의 동력을 얻곤 한다. 나는 걱정과 고마움으로 이루어져 왔다.
한스 리히터는 에세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 에세이 영화란 무엇인가. 그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평론가들의 노력이 있지만 그것을 옮겨적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 또한 에세이 영화라 불리우는 영화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만들 생각이지만 나는 스스로 에세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규정짓지 않는다. 그저 만들 뿐이다.
에세이를 가장 쉽게 말하자면 개인이 일상에서 느낀 반짝임을 사회, 정치, 문화, 종교 등과 엮어 확장시킨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 영상도 그렇다. 또 다른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이 영화는 단 5분 동안 독일에서 본 풍경과 경마장에서의 풍경을 빠르게 몽타주하며 보여준다. 하지만 이 짧은 영화는 효과적으로 한스 리히터가 본 독일 사회의 모습을 마치 에세이처럼 영상 언어로 표현한다. 1928년에.
에세이 영화는 매력적이다. 내가 감각한 세계를 나의 언어로 세계와 다시 엮어 풀어내는 방식은 재미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건, 시의성의 문제다. 과연 시의성이 없는 에세이 영화는 필요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닐까. 지금 상영되어야 하는, 지금 이야기되어야 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닌 것일까. 특히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테두리 안에서 작업을 하다보면 그런 고민을 한다. 내 작업은 필요할까. 필요를 구해야하나.
by. 모호
금주의 음악 앨범
에테르 1
by 모호
트랙리스트
1. babysbreath 2. Teardrop 3. Iwantyou 4. Fur
5. Dizzy
6. Plume
7. Burst
8. Tinkerwench
9. Charm
10. Moinaexquisiteflower
11. Butterfly
12. Suaredglowing
13. Glimmer
14. Youreyesimmaculate
15. Crushing
16. Blowyelashwish
17. Precious
18. Darkglassdolleyes
19. Finger
20. Halo
앨범 Bloweyelashwish
아티스트 Lovesliescrushing
발매 1993
길이 55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에테르는 없다.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물질로 믿었던 에테르는 물리학이 발전하며, 빛의 존재를 밝히며 사라졌다. 그러나 에테르는 있다. 아직 우리 곁을 떠도는 무언가. 수많은 장르 팬들을 열광하게 한 에테르는 아직 남았다. 지금도 에테르를 정의하고 느끼기 위해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에테르는 느껴지는 것. 부유하는 것. 나도, 우리도 모르는 새에 여전히 에테르를 느끼고 있다. 에테르를 감각했던 앨범 5장을 골라봤다. 가끔, 에테르가 그리워질 때 모호순에 에테르(숫자)라는 표제로 앨범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에테르 음악은 Loveslivescrushing의 Bloweyelashwish다.
음악의 장르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슈게이징이니 슬로우 코어니 크라우트 록이니 나누고 있자면 음악의 전도율이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음악은 고유의 전도율을 가지고 있다. 열처럼 흘러나오는 에테르는 개인의 감정, 경험, 맥락과 만나 반응한다. 우리는 어쩌면 일정량의 에테르를 받아들여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음악이든 영화이든 미술이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앨범의 장르를 나누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다. 앨범의 에테르가 나에게 온전히 전도되길 기다리며.
처음 이 앨범을 들은 건 소설을 써보겠다고 한창 책상에 앉아 거짓말을 지어낼 무렵이었다. 20대의 초중반. 거짓말을 하는데에 지쳐가던 나는 이제는 못하겠다고,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쓰는 일을 더는 못하겠다고 좌절하고 있었다. 나의 소설에는 항상 붙잡는 누군가와 떠나는 누군가가 나왔다. 결국 '도망'이었다. 나의 짧은 삶을 요약하는 단어. 그때 플레이한 이 앨범은 검은 커튼처럼 불투명하고 포근했다. 도망치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아졌다. 커튼 같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도망치지 않는 글을 썼다. 그 소설은 폐기됐다. 끈덕지게 나에 달라붙어 있는 글에는 티끌만큼의 거짓도 없어서 글의 육체를 해체할 수 없었다. 나는 커튼 같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에테르가 흘러나오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고 지금도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건 에테르를 느끼기 때문이다. 질투가 날 정도로 에테르를 뿜어내는 글과 음악, 무빙 이미지를 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파편화하지만 결국 나다. 다음 작업에서는 소설을 빌려오기로 했다. 에테르를 빌리는 셈이다. 나는 그런 편법으로라도 에테르를 추종한다.
언제든지 독자님들의 에테르를 공유해주시길. 타인의 에테르를 훔쳐보는 건 즐거운 일이니.
이번 주의 가사는 쉽니다.
금주의 사진
귀국
by 모순
시차 적응 중이다. 근데 적응 하기 싫다. 12시 이전에 잠들고 7시면 눈이 떠진다. 아침이 길다. 귀국 후 첫날엔 5시에 밖을 나섰다. 답답해서 편의점에 갔다. 수많은 먹을 것들, 1+1, 2+1, 없는 게 없고, 바깥은 어두운데 알바생은 혼자였다. 새벽 공기는 상쾌했다. 몇 시간 뒤 탄핵 선고가 있었다. 한국에 돌아왔구나, 실감했다. 집이라는 감각은 굉장히 자주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