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가 곧 폭발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오래 고민하던 걱정들이 한순간에 끓어올라서 걷잡을 수 없이 넘쳐버리는. 그럴 때면 나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몇 가지 증상을 보인다. 말을 더 추상적으로 하고, 눈앞에 해결해야 할 과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밥을 먹지 않는다.
살이 많이 빠졌다. 벨트 한 칸을 더 조여야 한다. 논리가 많이 떨어져서 무언가 설명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한다 (하지만 모호순을 써야 한다). 그래도 오늘은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처리했다. 그리고 점심을 챙겨 먹었다. 서브웨이에서 로스트 치킨에 홀스 래디쉬와 바베큐 소스를 뿌려 먹었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조립하는 과정을 보며 내가 해온 노동들을 떠올렸다. 노동을 떠올리면 나이가 연상되고, 떠나보낸 일들이 지나가고, 괜히 조급해진다. 아마 폭발의 예감은 '직업'이 없기에 피어오르는 것이다. 학생이라고 나를 소개해야 할지, 연출자라고 소개해야 할지.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들어맞는 직업이 없어 불안하다.
언제쯤 당당해지려나 싶다. 당당해지려는 주체가 누구일지를 먼저 정해야 된다. 떠오르는 사람이 셋쯤 있다. 그들과 대화해 보려는 노력 없이 멋대로 추측하고 만족시키려 한다. 당분간은 내 멋대로 해야겠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가 떠오른다. 현실에는 점프 컷이 없다. 사이의 쇼트들을 봐야 한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유리 너머로 지켜봐야 하는 것처럼. 멋대로 쇼트를 잘라내지 말자. 필요한 부분에서만 점프 컷을 쓰자.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점프 컷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배가 부르다. 허리춤이 기분 좋게 살짝 조여온다. 독자님들도 이번 한 주 식사를 잘 챙겨드시길. 점프 컷을 적절히 배치하시고 건강하시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아피찻퐁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자는 드물 것이다. '열대병'이라든지 '정오의 낯선 물체'라든지. 나 역시 그의 대표작을 여러 편 보았지만 어디 가서 시원스레 그를 이해한다고 할 입장은 되지 못했다. '모바일 맨'은 이런 나의 마음을 개운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는 이 4분의 영상을 분명하게 느꼈다.
이 짧은 영화는 인권에 대한 영화다. 4분 동안 어딘가로 달리는 자동차 짐칸에서 남자 둘은 바람을 맞으며 서로를 촬영한다. 카메라를 응시하기도 하고 몸에 새겨진 타투를 보여주기도 한다. 끊임없는 바람 소리가 가득하다. 그들을, 또 소리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미지와 사운드는 들이친다. 거침이 없다. 영화의 말미, 한 남자는 웃통을 벗어재끼고 그 안에 달고 있던 마이크를 치워버린다. 소리를 내지른다.
워크숍 수업에서 영화를 보고 떠오르는 감정에 대해 묻는 질문에 '자유로움'이라고 답했다. '자유로움'은 감정의 언어에 속하나. I feel free라는 문장이 퍼뜩 떠오른다. 그럼에도 자유로움 이전에 얇은 막이 하나 덧씌워져 있는 것만 같다. 감정은 소리와 가깝다. 새어 나오거나 터져 나온다. 벌거벗은 그의 상체가, 벗어던진 마이크를 뚫고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떠오른다. 카메라에 언뜻 지나가는, 환하게 웃고 있는 아피찻퐁의 표정까지.
자유로움을 둘러싸고 있던 한 꺼풀의 막이 벗겨진다. 이 짧은 영화는 인권에 대한 영화다.
금주의 음악 앨범
밴드를 좋아한다는 건
by 모호
트랙리스트
1. Tom Violence 2. Shadow of a Doubt 3. Starpower 4. In the Kingdom #19 5. Green Light
6. Death to Our Friends
7. Secret Girl
8. Marilyn Moore
9. Madonna, Sean, and Me
10. Bubblegum
앨범 Evol
아티스트 Sonic Youth
발매 1986
길이 39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EVOL은 LOVE를 거꾸로 뒤집은 단어다. 전설적인 인디밴드 Sonic Youth의 훌륭한 앨범들 중에서도 EVOL이 좋은 평가를 받는 건 뒤집어져 있는 타이틀처럼 그들의 음악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렇다. EOVL은 모서리에 걸쳐있는 앨범이다.
밴드를 좋아하는 일은 하나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밴드와 시대정신을 나에 투영해 결합하는 과정이자 탐험이다. 시대정신은 차치해도 괜찮다. 적어도 밴드의 정신은 앨범에 구석구석, 또 차례대로 혹은 변칙적으로 스며들어 있어서 곱씹어 듣다 보면 어느새 몰입되어 있다. 멋진 밴드 하나는 일상을 바꿀 수 있다. 인디 뮤직의 장점은 이 즐거운 과정이 더욱더 세밀하고 선명한 질감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Sonic Youth를 처음 '느낀 건' 한창 달리기에 빠져있던 20대 초중반 무렵이었다. 나는 전력의 달리기를 좋아한다. 땅을 박차고 잠시 떠오르는 기분 때문이다. 에드워드 머이브릿지의 달리는 말 마냥 순간 공중에 떠있는 순간이 감각으로 포착된다. 나의 전력 달리기 앨범은 세 가지 정도가 있는데 EVOL은 그중의 하나다. EVOL의 2번 트랙 Shadow of A Doubt가 흘러나올 때쯤 나는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특히 기억나는 달리기는 화성에 혼자 살 때의 아침 달리기다. 회사를 그만두고 근처의 영화관에서 일했는데, 나는 오픈 타임을 맡았다. 어두운 영화관에 불을 켜고 첫 영화를 준비하는 순서들이 좋아 자원한 일이었다. 하루는 평소보다 20분 정도 늦잠을 잤다. 나는 머리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한적한 주말 아침을 달렸다. 귀에는 당연히 이어폰이 꽂혀있었고, 본능적으로 EVOL을 골랐다. 걸어서 20분 거리, 나는 한달음에 달려 10분 만에 영화관에 도착했다.
역시 아무도 없는 영화관.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 불을 하나씩 켰다. 팝콘을 만들려고 옥수수를 기계에 넣었을 때야 앨범이 끝났다.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조용하다. 그제야 숨을 골랐다. 마구 뛰던 심장과 진동하던 달콤한 팝콘 냄새, 달리는 기타와 킴 고든의 목소리가 꿈같았다. 아주 멋진 꿈에서 이제 막 깨어난 것 같았다. 밴드를 좋아하는 일은 그런 순간을 선물한다.
[Shadow of A Doubt]
Met a stranger on a train He bumped right into me I swear I didn't mean it I swear it wasn't meant to be Must a been a dream from a thousand years ago I swear I didn't mean it I swear it wasn't meant to be From the bottom of my heart He was looking all over me Together ever after He said "You take me & I'll be you" "You kill him & I'll kill her" Kiss me I swear it wasn't meant to be I swear I didn't mean it Kiss me Kiss me in the shadow of Kiss me in the shadow of a doubt Kiss me It's just a dream It's just a dream I had Swear it's just a dream Just a dream Dream I've h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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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사진
도시 여행
by 모순
건물, 신호등, 휴지통, 가로등 무엇이든 그것만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각도가 나오질 않는다. 서로가 얽혀서 배경의 배경을 중첩한다. 도시의 속성이다. 인식의 초점이 없으면 감각은 휩쓸리고 정서도 수몰된다. 거대 도시 일수록 더욱 그렇다. 도쿄와 뉴욕 같은 도시를 여행하는 건 그래서 기피했다.
도시 여행의 매력은 그 도시가 내 것이 되는 것 같은 묘한 감각에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그 도시의 달콤함과 혜택을 즐길 여유와 여력이 없다. (나는 서울 여행에 실패한다. ‘여기는 트빌리시이다, 바르샤바이다, 룩셈부르크다, 마닐라다’ 주문을 외워 봤자 실감에서 탈출 할 수가 없다. ) 그들의 주중과 낮은 사무실이나 작업실 안이다. 의무와 책임에 달라붙어 있다.
여행자는 다르다. 여행자는 눈치가 없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본국에 두고 온 노바디nobody다. 마음껏 발길 가는 대로 도시를 뜯어 먹으면 된다. 라고 생각해왔는데 거대 도시megacity에서는 그게 잘 안됐다. 노바디가 너무 많다. 뭐든 금새 유명해져 노바디로 수두룩하다. 한적함은 소유의 정서. 도시의 한적함은 여행자의 것.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넣는 순간 더이상 노바디가 아니다. 초점을 맞춰보자. 무엇을 인식하고 싶지. 나 누구 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