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마지막 도착지다. 아이슬란드, 스위스, 몰타 이제 뉴욕이다. 뉴욕은 예정에 없었으나 친한 친구가 이곳으로 막 이직하면서 여차저차 놀러 왔다. 내년이 되면 이 녀석은 결혼한다. 그리고 몇 년 후면 아빠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내 될 분이 4명을 원하… 내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이 녀석이 아직 총각일 때 함께 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서다. 이럴 수 있는 친구가 거의 남지 않았기에 꽤 소중한 기회다.
친구들의 결혼 소식은 늘 기쁘고 감격스럽지만 마음 한 켠이 호젓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예전처럼 머저리 같이 불러내거나 놀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 사회에서 나름의 자리와 입장을 다지려 애쓰며 살고 있지만, 함께 만날 때면 유아적이고 철없는 그 시절의 말투와 행동으로 돌아간다. ‘너 어떻게 밖에서 멀쩡한 척하고 다니냐’며 서로 놀리기 바쁘다. 돌이켜보면 이런 시간과 감각이 늘 나를 속세에서 구출해 내곤 했던 것이다. 결혼한다니 성큼 어딘가로 한 발자국 나아가 멀어지는 듯하다. 결혼은 분명 좋은 일인데 축복할 일인데 자랑스러운데 그런데 왜. 모순이다.
미국은 여행지로서 큰 매력이 없다. 세 번 정도 와본 듯 한데 한 번은 친척 동생이 가고 싶어했는데 마침 가까워서 였고, 두 번은 친구가 해외 유학 중이었는데 우연히 미국 브루클린이어서 그냥 놀러 갔었다. 그 친구 덕분에 20대에 뉴욕을 두 번이나 여행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거대 도시에 큰 흥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일본을 많이 갔지만 도쿄는 가지 않았다. 거대 도시에 있으면 너무 많은 콘텐츠와 ‘것’들에 압도된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면 ‘넌 서울에 살지 않느냐’라고 묻겠지만, 여행과 생활은 이파리와 구명조끼의 사이 만큼 상관이 희미하다.
이제는 바뀌었다. 내게도 좀 더 좋아하는 것들이 생겼다. 10년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나를 실망시키거나 흥분시킨다. 가고 싶은 곳과 안 가도 되는 곳들이 구글맵에서 균열을 이뤄 갈라진다. 시간이 부족해지기도 하고, 원하는 날씨를 염원하기도 한다. 하루 종일 밖에 안 나가기도 한다. 좀 더 쓰고 싶은데 지면이 찼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급하다. 이곳 카페에서는 노트북을 두고 화장실에 갈 수 없으니. 다음 호에 이어가겠다.
by. 모순
1. 금주의 다큐멘터리
탐타 가브리 치제, <조지아의 상인> by 모순
2. 금주의 음악 앨범
Belle and Sebastian, <If Yor're Feeling Sinister> by 모호
3. 금주의 사진
<연주> by 모호
금주의 다큐멘터리
조지아의 상인
by 모순
제목 조지아의 상인
감독탐타 가브리 치제
연도 2018
길이 23분
관람 넷플릭스
‘땅 파봐라 돈 나오나’라는 농담은 이곳에서 진담이다. 감자가 화폐로 사용되는 여기는 돈을 경작하고 수확한다. 육중한 몸에 걸걸한 목소리의 중년 남자가 ‘다마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 차에는 여러 물품이 있다. 그는 감자를 벌기 위해 작은 마을로 가고 있다. 카메라는 트럭 안에서 여러 연령대의 주민들을 본다.
저 마을에 난 가본 적 없는데 아이들이 집안에서 힙합을 들으며 노는 장면은 분명 직접 봤던 장면이다. <팩트풀니스>에서 저자는 우리가 흔히 문화라 부르는 일상생활의 모습이 사실 소득 수준에 따라 정해진다고 주장했다. 몽골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 촬영 갔을 때 만났던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은 '꿈'이 있었다. 대부분이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의사를 말했고 케이팝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으로 몽골 너머 세상을 매일같이 여행했다. 그리고 나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고 소에게 밥을 주고 흙바닥에서 넝마를 덮고 잤다. 일찍 잤다. 전기가 없으니까.
아이들의 꿈을 마음 깊이 응원하고 싶었지만 곁에서 그들의 일상을 감각하면 주먹이 풀어졌다. 힘겨웠다.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침투하는 세상의 온갖 이미지가 가난을 초조하고 호젓하고 남루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꿈은 얼마나 잔인한가,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은 세상의 빛보다 어둠을 더 쉽고 짙게 전파하는 것인가, 세계화는 상품으로 전달되고 상상으로 고통되는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몽골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우수수했다.
남자는 비눗방울로 아이들과 놀아준다. 아이들은 물건으로 세상을 배우고 엿본다. 그는 부모님을 데려와 사라고 한다. 늙은 여자가 돈이 없다며 깎아 달라고, 아니 그냥 선물로 주면 안 되냐고 한다. 그건 안된다. 냉소하기엔 이르다. 상인이 상인 노릇을 했을 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다린다. 그가 오지 않으면 이들은 생필품을 사러 먼 길을 떠나야 한다. 그들은 차가 없다. 남자는 고마운 존재다. 그는 정부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상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전기 다큐멘터리다. 가장 잘 팔리기 때문이다. 냉소하기엔 이르다. 넷플릭스가 넷플릭스를 했을 뿐이다.
금주의 음악 앨범
봄에 대한 단상
by 모호
트랙리스트
1. The Stars of Track & Field 2. Seeing Other People 3. Me and the Major 4. Like Dylan in the Movies 5. The Fox in the Snow
6. Get Me Away From Here, I'm Dying
7. If You're Feeling Sinister
8. Mayfly
9. The Boy Done Wrong Again
10. Judy and the Dream of Horses
앨범 If Yor're Feeling Sinister
아티스트 Belle and Sebastian
발매 1996
길이 41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봄의 음악이 연상되지 않는다. 여름과 겨울 음악은 분명한데. 오랜만에 애플 뮤직 보관함을 둘러보며 봄을 겹쳐봤다. 봄 봄 봄 봄 봄. Belle and Sebastian에서 손이 멈췄다. 봄을 보내는 영화에 여자 주인공이 졸업 앨범에 적었던 가사. 비록 그 곡이 수록된 앨범은 아니지만 If You're Feeling Sinister은 섬세하고 생명력 넘치며 따뜻하고 추운 봄 앨범이다.
계절을 감각하기 어렵다. 몸은 알고 있는데 마음이 따라가질 못한다. 여름과 겨울은 사랑의 계절. 봄은. 겨울과 여름을 잇는 봄에 단어를 붙일 수 없다. 설레임이라는 쉬운 단어가 있지만 적절한지 모르겠다. 벚꽃 때문일까, 따스해지는 날씨 때문일까. 설레임이라는 단어가 가루처럼 간질거리다 흩어져버린다. 겨울이 지나면 금방 여름. 여름이 지나면 금방 겨울. 봄은 두 계절이 섞인, 파랑과 초록이 섞인 바다색이다.
바다 색이다. 파랑과 초록이 섞이면 바다색이랬는데. 떠오르는 바다는 겨울에 보았던 하얀 포말과 푸른 검은색이다. 역시 알 수 없다. 얼마 전 블로그에 업로드한 이혜미 시인의 <빌려온 봄>이라는 시에는 '겨울에도 봄이 있어요. 겨울의 여름, 겨울의 가을, 겨울의 겨울. 세분된 나날의 조각들을 모아 시간을 재현할 수 있다고 믿어요?'라는 구절이 있다. 스물 여덟번째 봄을 맞이하고 나서야 봄의 속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각자의 봄이 있다. 그럼 내 봄은.
나의 봄에는 겨울과 여름이 묻어있다. 그렇다면 여름과 겨울은 사랑의 계절, 봄과 가을은 묻은 사랑의 계절. 먼 과거에 '사랑한다'는 '생각하다'의 의미로 널리 쓰였다고 한다. 이 생각을 하면 사랑을 조금 쥐어볼 수 있다. 봄을 조금 쥐어볼 수 있다. 우리가 제일 잘하는 건 생각이니. 봄의 음악을 골랐다.
'Thought there was love in everything and everyone'
-6번 트랙 'Get Me Away From Here, I’m Dying'의 가사
[추천 트랙]
1. The Stars of Track & Field
3. Me and the Major
6. Get Me Away from Here, I'm dying
9. The Boy Done Wrong Again
♪ 앨범 단위의 감상이 가장 건강에 좋습니다.
금주의 사진
연주
by 모호
망원 한강 공원으로 밤 산책을 나갔다. 굴다리에는 옅은 바람이 불었다. 조금 찼지만 오랜만의 산책에 기분이 좋았다. 굴다리를 지나자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섹소폰을 연주하고 있었다. 웬만해선 길에서의 연주를 보지 않는 나였지만 잠시 멈췄다. 어떤 남자가 작은 스크린에 영상을 틀어놓고 반주에 맞추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멈췄다. 강아지도 멈췄다. 말없이 각자 걸터 않아 음악을 들었다. 숭고할만치 부드러운 시간이 지나갔다. 무한한 공간에서 갇히지 않고 흩어져버리는 소리가 자유로웠다.
나는 다음 생에 반드시 음악가로 태어날 것이다. 연주자도 좋다. 내 기분이 내킬 때 언제든 악기를 집어들고 연주하고 싶다. 그러면 참 자유로울텐데. 마음이 좀 나아질텐데. 생각이 남자의 공연으로 돌아온다. 남자는 무슨 연유로 이곳에서 연주하고 있을까. 어떤 계획과 어떤 기분으로 연주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듣고 있음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연주에 채 집중하지 못하고 은근히 시샘하는 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그는 쉬지도 않고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셨다가 하며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날이 추워졌다. 강바람이 불었다. 집에 가야한다. 다시 굴다리를 건너 강과 연주의 세계에서 도시로 넘어가야 한다. 산책하는 모두가, 그리고 연주하는 남자도 마찬가지. 도시로 넘어온 그는 아마 누군가 당신의 연주를 보고 글을 쓰고 있다고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