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다. 배를 하늘로 까뒤집고 물살에 떠내려가는 수달 꼴이다. 추석에는 가족을 따라 경주까지 흘렀고, 연휴가 끝나자 밀물 차오르듯 서울로 돌아와 맥없이 일상을 부유하는 중이다.
삶을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는 요령은 의외로 간단하다. 달력 빈칸에 앞뒤 관계 없이 일정을 넣고 복종한다. 그러면 저절로 하루가 흐르고, 일주일이 떠밀리고, 한 달이 쓸려 내려간다. 내가 애써 저을 필요도 없다.
다만 수달과 다른 점이 있다. 녀석은 영역을 가늠하며 하늘을 구경하지만, 나는 어디인지도 모른채 휩쓸리며 눈도 제대로 못 뜬다. 예고없이 방류된 치어처럼 어리둥절해서 제 물길 못 찾고 그저 하루를 긁적거리는 꼴이다.
지금은 이게 좋다. 머리는 얄팍해지고 단어도 가난해져서 슬슬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지만,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이렇게 밑천까지 바닥나 볼 필요가 있을 것만 같다. 지금 행색도 영락없는 수달이다. 소파에 누워 불룩한 배 위에 노트북을 얹어놓고, 게으른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타자를 친다. 우리집 천장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by 모순
1. 금주의 다큐멘터리
<고릴라 이야기> by 모순
2. 금주의 음악 앨범
<Here Because of Hope> by 모호
3. 금주의 사진
<이것은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가 아니다(?)> by 모호
금주의 다큐멘터리
블루
by 모호
제목 데이비드 애튼버러: 고릴라 이야기
감독 제임스 리드
공개 2026
길이 1시간 17분
관람 넷플릭스
수달처럼 소파에 누워 모니터 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날, 인간을 다룬 영화를 고르는 건 패착이다.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다큐멘터리가 ‘안전’하다. 그는 자연을 찍는다. 험지로 직접 들어가 탐험하고, 내레이션으로 날것의 자연에 드라마 서사를 입혀 명성을 얻었다. 눈부시게 발전한 촬영과 음향 기술도 한몫했다.
비판도 따른다. 익숙한 플롯을 위해 실제 시간순이나 촬영 기간과는 무관하게 장면을 잇고, 후반 작업에서 있지도 않던 소리를 입혀 자연을 낭만화하거나 조작한다는 시선이다. 하지만 그래서 안전하다. 그런 것은 이제 하나의 익숙한 관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안전하게 관람하는 세계.
100세가 된 애튼버러는 더 이상 정글 속 카메라 앞에 직접 서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 자료를 훑으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나는 지금 배를 까뒤집고 누운 수달 시청자다. 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대리석 같은 서늘한 바람이 창문을 드나든다. 영화의 여백에서 자아를 쓸어댈 여력 없는 수달은 그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는다.
가끔 극적 전개를 위해 억지로 꿰어 맞춘 컷들에 불쑥불쑥 질문이 떠오르지만, 화면 속 할아버지가 내 의문을 들을 수 없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 사이다를 꺼내 마시면 그만이다.
르완다의 한 보호구역, 고릴라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리더는 늙은 수컷 기쿠라시. 젊은 수컷 우부주가 그의 자리를 노린다. 싸움에서 승리한 그지만 우두머리의 자리는 완력만으로 얻을 수 없다. 최상위 암컷인 테타의 승인이 필요하다. 또한 쫓겨나는 수컷 임푸라, 이방인 암컷 인양게가 무리에 어느새 스며들어 자리를 잡으려는 시도. 결국 또 사람 이야기다. 영화를 잘못 골랐다.
금주의 음악 앨범
Here Becuase of Hope
by 모호
트랙리스트
1. Part 1
2. Blow Your Trumpet
3. Sweet Echo
4. Don't Worry
5. Only Love (feat. Pa Salieu)
6. Someday
7. Part 2
8. Birdie Sing
9. The Last Stand
10. Well Organised (feat. Lila lke)
11. El Corazon
12. Bunny on the Rise
13. Part 3
14. All I Need (feat. Leona Lewis)
15. Jubilee Feeling
16. Black Flag
17. Most High (feat. Libianca)
앨범 Here Because of Hope
아티스트 Ezra Collective
발매 2026
길이 63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기차 여행을 떠나면 새로운 음악이 듣고 싶어지곤 한다. 익숙해서 편안한 음악이 일상을 벗어나며 또 다르게 들리는 경험도 좋지만, 역시 떠날 때의 테마곡으로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음악만큼 어울리는 것이 없다. 명절을 맞아 서울을 떠나며 좀처럼 게을러 한동안 눌러보지도 못했던 음악 앱의 신보 탭을 오랜만에 둘러봤다. 그렇게 새로운 음악이지만 익숙한 이름들을 훌쩍 지나 매력적인 앨범 커버를 가진 Ezra Collectivce의 Here Because of Hope를 만났다.
레게 기반의 재즈. 총 3가지의 파트의 나레이션 트랙으로 나뉜 앨범은 Blow Your Trumpet의 비장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해 때로는 서정적이고 때로는 신나게 오르락 내리락한다. 앨범의 하이라이트는 part 2였다. 꽤 즐거운 정도였던 part 2의 멋진 사운드 스케이프를 지나 part 2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고개가 까딱거렸다. 특히 11번 트랙 El Corazon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정도. 다시 정돈되는 part 3까지 지나자 충무로 한끼한잔에서 든든한 백반을 먹은 것처럼 만족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구독자님들은 이번 명절에서, 혹은 훌쩍 떠난 여행에서 어떤 새로운 음악들을 만나셨을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나에게 한번도 재생된 적 없던 음악과 어떤 휴일을 보내며 어떤 기억을 안고 돌아왔으련지.
금주의 사진
이것은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가 아니다(?)
by 모호
명절의 대전은 조금 더 작은 도시 같았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걸었고 거리에는 빵 냄새가 그윽했다. 그중에서도 싱거운 빵을 구워 파는 길 모퉁이의 가게 앞에 소파 하나와 의자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습관처럼 버려진 의자 사진을 찍어 모으는 취미가 있던 터라 고민 없이 휴대전화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꽤 멋진 의자다. 의자 사진 게시물의 첫 번째 사진이 될만 하다!'고 생각하고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소파 뒤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호수에 비친 달 그림자가 아니다. 글쎄. 절대로 내가 쓰거나 소리 내어 읽을 만한 문장이 아닌데 이상하게 익숙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곰곰이 문장을 곱씹다가 끝내 그 익숙함의 출처를 찾지 못하고 궁금증을 못 이겨 검색창에 문장을 옮겨적었다. 정말 이외의 인물과 뉴스 기사들의 헤드라인에 진한 글씨로 이 문장이 강조되어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익숙하더라. 기억이란 것도 이상하고 글이란 것도 이상하고 사진이란 것도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