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후배의 졸업 영화 촬영을 맡은 지난 2주가 정신 없이 지나갔다. 처음 겪어보는 극영화 촬영 현장은 재밌었다. 모두가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역할들이 모여 씬 하나씩이 완성되어갔다. 많아봐야 셋, 적을 때는 혼자이기도 한 다큐멘터리 현장과는 차이가 컸다. 카메라와 오디오가 돌고, 이내 슬레이트를 치고. 숨 죽인 채 시작되는 움직임과 내 눈앞의 7인치 짜리 모니터 프레임 안에서 녹화되는 이미지는 영화라는 매체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4회차의 촬영 내내 이상하게도 영화 '파벨만스'와 '가능한 사랑'이 계속 생각났다. 내가 영화를 찍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던 때에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와 가장 최근 극장에서 보고 무력함을 느꼈던 영화가.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언젠가 운이 좋다면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은 영화쯤으로 생각하던 파벨만스의 씬들이 조각처럼 떠올랐다. 영화의 마지막에 특별 출연했던 데이빗 린치는 이제 세상에 없고 나는 지금 영화 속 스필버그와 예지처럼 영화를 찍고 있다. 내가 녹화 버튼을 누른 컷 중 지평선을 가운데에 둔 컷이 있던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세계에 대해 처음 배운 책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집 거실 책장에 가득했던 어린이용 세계 문학 전집과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였다. 누나를 따라 한 권씩 재밌어 보이는 표지를 골라 책을 읽던 설렘을 잊을 수 없다. 나는 특히 갈매기의 꿈이나 노인과 바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여러 번 재밌게 봤다. 아직도 그때 몇몇 나라와 사건들을 떠올리면 소설의 내용과 만화책 그림이 먼저 생각날 정도다. 집에 있던 먼나라 이웃나라는 대부분 유럽을 다룬 편들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당연하게도 이 유럽 열강들이 과거 식민지 지배를 했던 내용들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이 영화를 이주의 다큐멘터리로 고른 건 사실 탈식민주의나 폭력, 프란츠 파농에 관심 때문은 아니었다. 어렴풋이 주워들은 이 영화의 구조와 표현 방식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촬영을 마치고 늦은 시간에 피곤한 몸으로 비몽사몽 영화를 틀고, 이내 부끄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인터뷰와 아카이브, 이 영화가 어떻게 관념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방식을 느끼기 전에 프란츠 파농의 텍스트가, 스피박의 글을 읽는 목소리가, 여성들의 인터뷰가, 아카이브 속 이미지가 들이쳤다. 뻔한 말이겠지만 영화의 표현 방식은 뜨거운 이미지와 목소리, 텍스트를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선택에 불과했다.
그때 집 거실에 있었던 책장은 이제 서재 방 한쪽으로 옮겨져있다. 이제 그 책장을 사용할 일은 없지만, 나에게는 더 큰 책장이 있다. 한동안 그때만큼의 설렘과 그때만큼의 낯섦을 잊고 지냈다.
금주의 음악 앨범
kenopsia
by 모호
트랙리스트
1. think with your lungs
2. sorry days
3. nail
4. life imitates life
5. what does this room look like
6. thin
7. snarky
8. soil
9. stick (feat. kmoe)
10. gesture gesture gesture
앨범 kenopsia
아티스트 quannnic
발매 2022
길이 34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슈게이징은 어쩌면 20대의 전유물일지도 모르겠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장르를 말할 기회가 있다면 꼭 슈게이징을 끼워넣곤 했는데, 이제는 자신 있게 슈게이징을 말하기 어렵다. 2016년에 슈게이징을 듣던 마음과 2026년에 슈게이징을 듣는 내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슈게이징을 물의 이미지로 떠올리곤 했다. 속이 흐릿하게 비치는 작은 방울 같아서, 혹은 AT 필드와 같아서 필연적으로 우리보다는 나에 가까운 음악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슈게이징의 이미지에 대한 정의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방울 안에 있을 시간이 없을 뿐이다. 궁금한 이야기가 많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그 영향 때문일까. 유독 올해는 슈게이징 앨범에 전만큼 손이 가지 않는다. 지난 주, 촬영지로 가기 위한 운전을 하기 전, 보관함 앨범을 성의 없이 휙휙 넘기다가 2022년 즈음 발매 됐을 때 즐겨 들었던 quannnic의 kenopsia에 손이 멈췄다. 오랜만에 충분한 양의 노이즈가 차에 가득 찼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서울의 거리 풍경이 친근했다.
금주의 사진
뭉개뭉개
by 모순
갈수록 선명하지 않은 것이 좋다. 현실이 날카로워져만 가서 그런가, 자꾸만 봐야하는 것들은 어느정도 뭉개진 것이 좋다. 빈티지 렌즈를 검색해보는 것도 그래서 인 것 같다. 이 녀석들도 자꾸만 비싸져만 가고 구하기도 어려워져서 어물쩍거리다가 화면을 닫는다.
다음달 일본 가메오카로 출장간다. 모호도 함께 하는데 오늘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설렌다. 그곳에서 찍는 이미지는 조금은 더 흐리고 뿌옇게 담아보고 싶다. 이미 가지고 있는 필름카메라 빈티지 렌즈 두 알에 어댑터를 물려서 영상카메라로 이모저모 찍어보고 싶다. 두근거린다.
이 사진 역시 다카마쓰의 어느 찻집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찍은 것이다. 쨍한 날씨에 새파란색, 새빨간색, 도려내듯 나뉘었던 그늘과 양지의 대조가, 알맞게 문질러져 있다. 날카로움이 무너진 자리마다 여백이 생겨나 비로소 자꾸 들여다볼 여력도 생긴다. 이런 사진들만 골라 인화해 책상 곁에 붙여둘까 싶다. 눈앞에 놓인 모니터라는 것은 늘 지나치게 선명하여 도무지 눈 둘 곳을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