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외국어를 배울까. 시험을 보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커리어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외국 사람과 대화하며 사고 방향을 바꿔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모국어로는 들어갈 수 없었던 방대한 지식의 방 안을 외국어를 빌려 들여다보고 싶어서도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외국어로 대화한다는 뿌듯함이나 개인적 성취 그 자체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있는 것 같다. 이 점을 말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인간의 의식은 모국어에 갇히지 않는다. 우리는 언어 이전에 무언가를 느낀다. 어린아이가 서운해할 때 그 아이가 ‘서운하다’라는 말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답답하다’라는 단어가 먼저 찾아가서 그 사람의 마음을 만들어 준 것도 아니다. 마음이 먼저고 말이 따른다. 그러므로 영어로 말하든, 스페인어로 말하든, 중국어로 말하든 그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우리의 감정은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어 어휘 ‘눈치 본다’, ‘치사하다’가 영어 단어 목록에 정확히 포개지는 표현이 없다고 해서 영어 화자에게 그런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니까, 하나의 자연어에는 그 언어만큼의 그물이 있다. 바다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무엇이 건져 올려지는가는 그물의 모양과 넓이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은 말로 붙잡기 전부터 수많은 감정과 경험이 있고, 각각의 언어들은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필요했던 것들을 조금씩 구별하여 이름 붙여 왔다. 그 이름들을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하나의 언어는 하나의 그물을 만들어 온 것이다. 그 그물로 건져올린 것으로 감정과 세상은 현실의 몸을 얻고, 우리는 표현한다.
영어에서 ‘run’이라는 동사는 한국어에서 ‘달리다’와 대부분 포개지지만 정확히 같은 틀을 갖고 있지는 않다. 영어는 회사를 ‘run’하고, 프로젝트를 ‘run’하고, 시간이 ‘run out’된다. 한국어로 ‘나는 회사를 달리고 있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일본어 ‘付き合う(츠키아우)’라는 동사는 한국어로 ‘사귀다’로 번역된다. 그러나 일본어에서는 연인과 사귀는 것뿐 아니라 친구의 쇼핑에 어울려 주거나, 누군가의 술자리에 함께해 주는 것도 ‘付き合う’라고 표현한다. 한국어로는 각각 ‘사귀다’, ‘따라가 주다’, ‘어울려 주다’처럼 다른 말로 건져 올려야 하는 경험들이 일본어에서는 하나의 동사 안에 함께 걸려 있는 셈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어쩌면 또다른 그물의 조각들을 모으는 일이다. 이전에는 흐릿했던, 뭐라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서서히 의식으로 건지는 것이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이 이제야 조금씩 잡히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얻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같은 세상에 다른 그물을 하나 더 던져 본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어를 배운 사람이 더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편향과 고집은 단어 몇 개를 더 안다고 해서 사라질리 없다. 다만 세상을 향한 그물 하나가 더 생긴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런저런 관점과 정서를 조금이라도 더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삶을 풍부하게 하는지 아니면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인지는 같은 인생을 두 번 살아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덜 지루하고 덜 고루한 하루를 보내는 데 가끔 도움이 된다.
by 모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