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과 대전에서 자랐다. 스무 살에 서울로 오기 전까진 서울이 어떤 도시인지 전혀 몰랐다. 내게 서울은 63빌딩이나 롯데월드, 경복궁 같은 곳들이 전부였다. 서울을 제대로 걸은 적도 없던 것 같다. 서울의 풍경은 언제나 차창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대한 호기심이 크지도 않았다. 도시보단 전원이, 사람보단 동물이 좋아서 지방에 살아도 그만이다라는 생각이었다.
다만 대전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내 청소년기의 대전은 언제나 무채색이라서, 나를 바꿔주는 것들은 전부 서울에서 만들어지고 있어서 20대의 시작은 서울이었으면 했다. 지금이야 오히려 대전에서 한번쯤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 도망치듯 서울로 대학을 왔다. 강변 터미널에서 내려 2호선을 타고 대학이 있는 역의 입구로 나왔을 때, 특별한 것 없는 평일에 가득 차 있는 거리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정말 많은 사람이 있구나, 그리고 정말 많은 관계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한동안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규모에 압도되어 있었다.
내가 서울과 친해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이 도시를 여행해보는 것이었다. 지하철을 1시간 넘게 타고 서울의 반대쪽에 가보기도 하고, 처음 들어보는 낯선 지하철역에 내려서 정처없이 걷기도 했다. 그중 오래 전부터 목적지로 정해둔 동네가 이화동이었다. 새벽까지 꽂고 있던 이어폰에 가끔 고르던 에피톤 프로젝트의 앨범 '유실물 보관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트랙이었다. 곡 제목은 이화동이지만 사실 이 곡에는 이화동에 대한 묘사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좁은 이화동 골목길', '그늘 곁의 그림들', '하늘 가까이 오르니' 같은 언급이 전부다. 나머지는 (아마도 이화동을 같이 거닐었을) 너를 잊을 수 없다는 감정으로 채워져있다. 스무 살 5월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없고, 같이 거닐 사람도 없었지만 무작정 대학로로 향했다. 가파른 오르막과 생각보다 조용한 이화동 동네길.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에피톤 프로젝트와 한희정, 짙은 같은 앨범을 재생해놓고 봄날을 내내 걸었다. 곧 날이 어두워지고 이화동에서 나와 바로 옆 낙산 공원에 앉아서 야경을 봤다. 안경을 끼지 않아서 모든 빛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내가 서울을 기억하는 방식은, 그리고 그 첫인상은 이런 식이었다.
연출 중인 '서울'을 소재로 한 도시 영화를 곧 있을 영화제 피칭에서 소개해야 한다. 초고로 써둔 피칭 대본을 동료들에게 보여주며 조언을 구하자, 지금보다 더 솔직하게 서울에 대한 나의 감정으로부터 피칭을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했다. 그래서 어제는 앉아서 서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감각해온, 그리고 친밀해진 서울에 대해 생각했다. 서울에 대해 하나도 몰랐던 내가 서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정말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