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대상은 앞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세련된 더듬이 머리를 한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회사 대표이면서 동시에 뷰티 인플루언서인 그는 중국인으로 현재는 뉴욕에 산다고 했다. 촬영은 광화문 인근 길거리에서 진행됐다. 우리는 이미지를 찾아다녔다. 동생 말로는 소셜미디어 숏폼 관련 일이 원래 즉흥성이 중요하다고 일러주었다. 스토리보드와 로케이션이 정해진 ‘우아한’ 촬영이 아니라고 했다.
관습적 양식 테두리 안에서 허용되는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야 했다. 광화문 양길따라 늘어선 건축물들을 뒤에 두고 촬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건물에 세로로 붙어있는 즐비한 간판 앞으로 머리카락처럼 엉킨 전깃줄이 대표의 눈을 사로잡았다. 공중에 나란히 꼬여버린 것들이 그의 눈에는 낯선 이미지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중국이나 뉴욕에는 없는 시각적 자극.
골목길 뒤로 윤어게인을 외치는 시위대의 함성소리가 찌릿찌릿했다. 광화문이라는 장소적 맥락보다 간판과 전깃줄에 매혹되는 것이 관광의 속성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여행자의 특권이다.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역사적 모든 종류의 맥락을 끊어내고 떠남으로써, 던져진 그곳에서 노바디로서 자유로운 감각을 얻는 것이다.
촬영 중 대표의 친구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대표는 얼른 그들과 놀고 싶어하는 기색이 도드라졌고, 병아리같은 봄기운도 그런 마음을 부추기는 듯 했다. 오후 12시 30분, 예정보다 30분 일찍 촬영이 끝났다. 역시 현장에 최종 결정권자가 있으면 축복이다. 프로듀서와 동생과 카페로 갔다. 프로듀서도 중국인이었다. 억양이 없어서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앞으로 다른 일도 함께하면 좋겠다는 환담을 마무리로 각자 갈길로 떠났다.
돌아가는 길 내내 마음이 부풀었다. 비단을 펄럭여서 만든 것 같은 바람이 불었고, 도시 질서와 무관하게 제멋대로 꽂힌 나무에는 색색한 연두잎들이 풍성하게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 풍경들이 오늘만큼은 신나게 놀아야 한다고 자꾸만 속삭였다. 약속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다, 이렇게 한가로우니까 날씨가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흩날리는 봄꽃의 포자처럼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주머니에 꾸겨 넣고 일단 피곤하니까 소파에 누웠다. 다큐를 봤다. 중국 프로듀서가 말했던 홍콩 구룡성채에 관한 것이었다. 영화에 대해서는 ‘금주의 다큐멘터리’에 써봤다.
영화가 끝날 무렵 창문 밖으로 다시 날씨가 말을 걸었다. 그래, <센티멘탈밸류>를 오늘은 꼭 보자. 사실 집에 오는 길 저녁 8시 30분으로 예약해뒀다. 구룡성채 다큐가 끝날 무렵 전화가 왔다. 함께 일하던 팀장(?)님으로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는 지인이었다. “저녁에 <센티멘탈밸류> 같이 볼래요?, 다른 사람도 있어.” 소름 돋았다. 7시 45분 영화였다. 누군지 모를 한 사람의 정보는 묻지 않았다. 현실에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도착하니 같이 일했던 또다른 분이었다. 반가웠다. 극장은 생각보다 꽉찼고 영화는 좋았다. 끝나고 간단하게 피자와 맥주를 마신 뒤 각자 갈길 갔다.
마지막 지하철을 놓친 상태여서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토요일밤 광화문, 을지로 일대에는 나같은 낭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콘서트홀 화장실보다 치열한 택시경쟁이 불꽃이었다. 택시는 어느 정도 걷다가 때가 되면 잡기로 하고 집 방향으로 1시간 정도 걸었다. 결국 나이트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2시 정도였다.
흩날리는 포자 같았던 건 마음 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 그 자체였다. 둥둥 떠다니는 어제의 것들을 붙잡아 이곳에 내려 놓으니 어렴풋이 그 무늬가 보인다. 그것에 대해 더 써보고 싶지만 너무 지쳤다.
by 모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