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활력으로 인사하는 무리가 발을 구르고 있었다. 볕은 건물에 잘려 삼각형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개강이다. 일 년 만에 돌아온 학교에서 전문 영양사가 짜준 식단을 우적거리며 물끄러미 봄을 엿보았다.
학과 건물 3층 남자 화장실에는 낙서가 있다. 색까지 바꿔가며 정성껏 써둔 문장인데, 처음 보았을 때는 뜻이 잘 잡히지 않았다. 오늘 그 글귀가 읽혔다. 텍스트 뒤로 그 마음이 보였다. 변한 쪽은 나일 것이다. 일 년이 지나긴 지났구나 그리고 내게도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일년이라는 실감은 낙서가 주었다.
크리스 마커는 프랑스에서 1921년에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캐나다 공군에서 복무하면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함께 싸웠다. 종전 이후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성인이 됐다.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는 1957년 작품으로, 크리스 마커가 촬영감독과 동행하여 직접 시베리아를 여행하면서 촬영한 푸티지에 편지 형식의 글을 얹어 만든 다큐멘터리다. 당시 37세였다. 최초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한 소련 시베리아에서 크리스 마커의 사유를 엿본다.
카메라가 좌측으로 패닝하면 근대화가 한창이다. 척박하다고 여겨진 시베리아 지대에 전봇대가 세워지고 4년에 걸쳐 완공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호기롭게 지나간다. 유목민은 정착을 시작한다. 우측으로 패닝하면 자연의 삶이 있다. 숲은 울룩불룩, 강물은 울퉁불퉁, 사람들은 순록을 타고 넘실대며 이동한다. 이곳에서 축적된 노인의 시간은 유복한 지혜로 발현된다. 좌측과 우측, 새로운 패러다임과 과도기, 그 중간 어딘가에 삶이 놓여있다.
같은 장면이 세 번 반복된다. 다만 내레이션이 다르다. 한 번은 사회주의의 성취를 찬양하는 어조로, 한 번은 체제를 비판하는 냉소로, 또 한 번은 비교적 건조한 설명으로. 이미지는 그대로인데 영상의 의미는 전혀 다른 힘을 얻는다. 그들은 세뇌 당한 노동자들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성실한 주체인가. 아니면 이러한 이름 붙이는 시도 그 자체가 성찰되어야 할 행위인가.
금주의 음악 앨범
0%
by 모호
트랙리스트
1. Airplane
2. いきのこり●ぼくら
3. i am POD (0%)
4. Imperial Smoke Town
5. Mars 2027
6. 四月の支度
7. うたのけはい
8. 機械仕掛乃宇宙
9. はるなつあきふゆ
10. いりぐちでぐち
11. 永遠はさよなら
앨범 0%
아티스트 青葉市子 Ichiko Aoba
발매 2014
길이 91min
스트리밍 0%: 애플 뮤직 / 0: 모든 플랫폼
오랜만에 이치코 아오바의 음악을 틀어두고 작업을 했다.
7년 전, 이 앨범으로 이치코 아오바를 알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앨범의 스튜디오 버전인 0를 통해. 기타와 목소리로만 채워진 단색의 앨범을 재생하고 밤 산책을 했던 기억이 난다. 노래하는 일본어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가 어떤 노랫말을 부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악이 언어 없이도 이미 충분할 때가 많듯 이치코 아오바의 음악도 그랬다.
0%는 네 번째 정규 앨범 0의 라이브 앨범이다. 0을 듣고 시간이 조금 지나 이 앨범을 우연히 유튜브에서 발견했다. 20131125라는 날짜가 찍힌 트랙들. 정규 앨범과 달리 Airplane이라는 소개곡으로 출발해 약간 다른 구성을 지나 미수록곡으로 끝이 나는 이 긴 라이브 앨범에 한동안 푹 빠져있었다. 그 어떤 라이브 앨범에도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하던 내가 왜 그랬을까. 0%는 집중해서 들으면 슬펐고 배경음이 되면 편안했다. 산책을 갈 때에, 공부를 할 때에 배경음이 되곤 했다. 수록곡의 가사를 찾아보고, 그의 앨범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며 점점 0%를 듣지 않게 되었다. 당시 나에겐 여러모로 벅찬 앨범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이치코 아오바의 내한 소식도 들었지만 그런 벅찬 아티스트가 있었지, 나는 아마 그의 공연에 가기는 어렵겠다 하고 말았다.
며칠 전, 이사 한 집 거실 탁자에 노트북을 펴놓고 작업을 시작하며 오랜만에 작업 음악을 고르다가 이치코 아오바의 앨범에서 손이 멈췄다. 2020년의 앨범, 그리고 2013년의 0. 두 앨범이 연달아 재생되었다. 그 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길에 0%를 재생하고야 말았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금주의 사진
마음을 둘 곳
by 모호
집을 보러 다니던 때, 이 풍경이 참 마음에 들었다. 코앞의 도로를 경계로 해서 큰 도시, 아파트 풍경과 한 발짝 떨어져있는 것만 같았다. 줄 지어 늘어서 있는 아파트 너머로는 북한산도 보인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북서울 꿈의 숲이 자리하고 있다.
상경한지 어느덧 10년 정도가 지났다.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서울의 도처에서 거주지를 옮긴 것이 횟수로 4번이 된다. 그중 이 집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가장 마음에 든다. 제일 정돈되지 않은 곳, 암묵적인 룰이 가장 적은 곳, 사람들이 가장 천천히 걷는 곳. 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요즘은 급하지 않다면 지하철 역에서 마을 버스를 타지 않고 10분 정도를 천천히 걸어 올라오면서 동네와 친숙해지고 있다. 벌써 귀갓길 이정표가 될 길가에 놓여진 붉은색 쿠션의 2인 쇼파를 발견했다. 다음에는 카메라를 들고 걸어야지, 업력이 족히 20년 씩은 거뜬이 되어 보이는 저 식당들을 하나씩 가봐야지 하며 시간이 좀 더 여유로워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밴드 선결의 '급진은 상대적 개념' 앨범의 7번 트랙, '마음을 둘 곳'을 이곳의 테마곡으로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