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사진 폴더를 정리했다. 2018년부터 찍기 시작한 필름 사진과 2020년 무렵부터 시작한 디지털 사진들을 연도와 날짜별로 정리하고 파일명을 붙여줬다. 그간 나를 거쳐갔던 필름 카메라들과 디지털 카메라들이 찍어낸 사진들, 그리고 방문했던 장소들과 찍힌 사람들을 보며 지난 8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요즘은 영상보다 사진 이미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필름을 왜 찍는지, 사진을 왜 찍는지에 대해 거창한 이유보다 더 작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말로 표현하질 못하겠다. 그리고 왜 이미 돌덩이 같은 가방에 굳이 카메라를 넣어다니며 억지로라도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지도. 이제 건강하게 먹어야지, 운동을 시작해야지 같은 다짐처럼 이제 사진을 더 부지런히 찍어야지 하는 다짐을 하는지도. 찍어둔 사진을 보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으려나. 잘 찍은 사진이 눈에 먼저 들어오지 않고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다.
어린 시절 감옥에 투옥됐던 아빠가 보낸 편지에 성인이 된 딸이 답장을 보낸다. 아빠는 이제 감옥에서 나와 새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딸이자 감독인 다이애나 캄 반 구엔은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답장을 커다란 종이에 쓰고, 보여주고, 이따금 찢어낸다. 영화의 구성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감독의 보이스 오버, 어느 흰 공간에서 큰 종이에 편지를 쓰는 감독, 그리고 파운드 푸티지(가족 영상, 편지)가 스탑 모션 애니메이션처럼 편집된 시퀀스들.
가정을 파탄낸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사랑이 섞인 답장이 왜 잘 구성된 다큐멘터리의 형식이어야 했을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답장조차 하지 않고 마음 속에 묻고 살아갈, 답장을 하더라도 '종이'로 끝냈을 고백들을 감독은 영상 매체의 형식으로 만들어냈다.
지나간 사건에 대해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이제 그 일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뜻한다고 어디선가 읽고 들었다. 영화를 만드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하고 아버지, 나, 그리고 지난 기록(편지, 영상)을 영화의 한 요소로 끌고 와 '편집'한다는 건 어쩌면 글을 쓰는 것보다 더욱 현실을 손으로 직접 다룰 수 있게 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이해해보고 싶어하는 감독의 마음, 아마 평생 감독 스스로만 온전하게 알 수 있는(혹은 자신도 온전히 모르는) 그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편지 대신 카메라와 편집기 앞에 섰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를 보며 관객인 나는 그 겹겹이 쌓인 마음을 가늠하려고 애쓰고 나를 투영해볼 뿐이다.
금주의 음악 앨범
좀 웃긴
by 모호
트랙리스트
1. 좀 웃긴
2. 소나기
3. 아니오
4. 죽음
5. 소나무 숲
6. 좀 웃긴 (Remastering Ver.)
7. 소나기 (Remastering Ver.)
8. 아니오 (Remastering Ver.)
9. 죽음 (Remastering Ver.)
10. 소나무 숲 (Remastering Ver.)
앨범 좀 웃긴
아티스트 윤영배
발매 2012
길이 36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이 앨범의 제목을 참 마음에 들어했었다.
'좀 웃긴'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많이 웃긴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좀 웃긴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전혀 웃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슴슴한 사람인 것 같은데,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듣고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 좋았다. 20대 초반에 짐 자무쉬를 좋아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별 이야기가 아닌데, 유머를 남발하지 않는데 진지하게 웃긴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건 짐 자무쉬 영화네, 하는 확신이 든다.
슬픈 사실은 나는 '좀 웃긴' 사람과는 쉽게 친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먼저 다가가 '좀 웃긴' 사람이 좀 웃긴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그들과 친해질 수 있지만 나는 그러질 못한다. 그래서 내가 좀 웃긴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좀 웃긴 사람은 타고나는 것. 웬만큼 편하지 않으면 농담이 잘 나오지 않는 성격 탓에 좀 웃긴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그만둔지 오래다.
윤영배의 앨범 '좀 웃긴'은 좀 웃긴 앨범이다. 가사는 한없지 진지해 보이지만 어딘지 농담같고, 소리가 어딘가 비어있지만 더하면 안될 것 같고, 웬만히 예민하지 않고서는 그 차이를 알 수 없는 원버전과 리마스터링 버전이 한 Ep에 같이 포함되어있고. 오랜만에 '좀 웃긴'을 들으며 나도 '좀 웃긴' 사람이 되고 싶어했지, 한 50살쯤 먹으면 가능하려나, 70살은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흥얼거렸다.
금주의 사진
safe zone
by 모순
집 앞 고양이세수만 하고 가는 카페다. 늘 책 하나만 들고 간다. 회복이란 말이 거창하지만 어휘가 궁해서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상업적 장소지만 나는 이곳에서 바깥 생활하며 쓸려나간 무언가를 되찾는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이런 짓도 사회적 입장을 벗어내는, 일종의 세수다. 급하게 대충 마치고 나오니 이또한 고양이 세수라 할 수 있다. (원래 고양이 세수의 목적은 깨끗이 씻는 게 아니라 정신을 차림에 있다.)
사장에게 주문 외에 불필요한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렇게 이름도 일도 관계도 벗어두고 노바디nobody로 앉는다. 이곳은 내게 들러붙은 과거와 약점도 알지 못한다. 여행이 주는 익명성을 일상에서 잠시 빌려와 숨을 크게 한 번 마셔보는 것이다. 이 짓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함께 와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와 나눈 대화가 안그래도 작은 이 카페를 금세 얼룩지게 할 것이고, 나는 다음 방문 때 그 흔적을 분명히 찾아낼 것이다. 친한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오더라도 나는 다른 카페로 갈 정도로 철저히 이 원칙을 지키고 있다. 널린 게 카페다. 예외인 사람도 있었다. 어찌됐건 이곳에 누군가와 함께 오는 건 나로서는 속살을 보여주는 결심이 됐다. 이런 사소하고 이상한 고집 하나쯤은 나를 위해 남겨도 될 것이다. 앞으로도 격렬하게 혼자 올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