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여기 좀 앉아봐. 소개 영상 촬영 차 도착한 청송의 고택 사장님이 대청 마루에 걸터 앉아 옆을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모순과 사장님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보통의 숙소였다면 간단히 숙소 안내를 해주고 (이마저도 안내 문구가 적힌 A4 한장으로 대체하는 곳이 태반이다) 편히 쉬라며 떠나갔을텐데,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서 왔는지로 시작한 대화는 이 고택에서 머문 연예인들의 목록과 그 에피소드를 줄줄 읊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옆에 앉은 모순의 팔을 툭툭 치며, 아 그 누구더라, 그, 얼굴 넓적하고 충청도 사투리 쓰는 연예인 말이야. 서울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대화 방식에 피식 피식 웃음이 났다. 길고 긴 대화는 근처의 맛집 추천으로 겨우 끝이 났다.
저녁으로 그가 추천한 삼겹살 집에 갔다. 맛을 호언장담하던 그의 자신감처럼 그곳은 최고의 삼겹살을 팔았다. 모순과 삽겹살을 허겁지겁 먹다가 그와의 대화를 복기하며 다시 피식 피식 웃었다. 서울을 벗어나면 자꾸만 오지랖은 정이 된다.
by 모호
'이번 호 좋았어요'의 답장
저는 복통을 얻고 코감기를 떨쳐냈습니다. 유산균과 비타민을 잘 챙겨드세요. '내 몸은 내가 알아!' 안 됩니다... by 모순
1. 금주의 다큐멘터리
<킴스비디오> by 모호
2. 금주의 음악 앨범
<Drifting> by 모호
3. 금주의 사진
<욕실> by 모순
금주의 다큐멘터리
킴스비디오
by 모호
제목 킴스비디오
감독 데이비드 레드몬, 애슐리 샤빈
개봉 2023
길이 1시간 25분
관람 웨이브, 왓챠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는 '영화 마을'이라는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그곳에는 커튼 같은 책장에 만화책도 가득하고 VHS도 빼곡했다. 부모님과 영화 마을에 가면 케이스 표지에 있는 포스터를 구경하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영화를 골라 엄마의 책에 끼워 빌리곤 했다. 노란색에 초록색 포인트 디자인의 VHS를 플레이어에 넣고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두근거림이 떠오른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며 느끼던 묘한 쓸쓸함도.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의 영화는 그랬다. 아직 취향이란 것도 딱히 없던, 영화 속 세상이 항상 새롭고 내것 같고 커다랗던 때에 봤던 영화들. 그런 영화를 보여줬던 영화 마을의 책장에 가득하던 VHS는 멸종하고 한쪽 책장의 얇은 DVD로 바뀌었다가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가 사라져버렸다.
킴스 비디오는 한국인 김용만 씨가 미국 뉴욕에서 창업했던 비디오 대여점이다. 방대한 양의 VHS를 소유한 건 물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영화들의 해적판 비디오를 모으는 것으로 유명했다. 타란티노나 코엔 형제 같은 영화인들, 그리고 영화광들이 수시로 킴스 비디오를 드나들었다. 불법의 선을 넘나들어 세상에 보여지지 못하는 영화들을 집요하게 모으며 킴스 비디오는 일종의 아카이브 역할을 했다. 그런 킴스 비디오도 우리 동네의 영화 마을처럼 기술의 변화는 이기지 못했다. VHS의 시대가 끝나며 킴스 비디오도 자연스레 문을 닫게 되었다. 그곳의 회원이었던 두 감독은 그 많던 킴스 비디오 VHS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는 킴스 비디오의 사라진 VHS들의 행방을 쫓으며 진행된다.
다큐멘터리 '킴스 비디오'가 영화에 대한 영화인 동시에 '해적판', 즉 훔친 영화에 대한 헌정으로 반짝거리는 건 후반부.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도시에 갇힌(!) VHS를 해방시키는 장면이다. 테이프 특성상 (아마도)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VHS를 굳이 다시 훔쳐내고, 그 무리가 유명 영화 감독들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른 씬들의 촬영과는 달리 더 준비된 연출샷처럼 촬영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두 감독의 속내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구할 수 없던 영화를 어둠의 경로로 어렵게 구해 보고 또 그 영화와 사랑에 빠져봤던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금주의 음악 앨범
Drifting
by 모호
트랙리스트
1. Sam
2. 송시
3. 진달래 타이머
4. 치질
5. Drifting
6. 섬
7. Shalom
8. 시간
9. 두 번째 세상
10. Drifting (Instrumental)
앨범 Drifting
아티스트 미선이
발매 1999
길이 47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자기 전 음악 듣기를 끊은지 1년이 됐다.
이어폰이라는 물건을 갖게 된 이래로 거의 항상 음악을 들으면서 잤다. 음악 들을 시간이 많지 않던 고등학생 때는 들어보고 싶었던 앨범을 자기 전에 어두운 방에서 하나씩 들어보며 즐거워하곤 했다. 성인이 되어 혼자 살게 되면서는 스피커를 사서 자기 전에 애착 의자에 구겨 앉아 수면용 앨범을 고르고, 적당히 작은 음량으로 맞춘 후 잠자리에 드는 것이 하루의 마무리 루틴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잠드는 건 영상을 보다가 잠드는 것과는 다른 매력(둘 다 수면 건강에는 치명적이다)이 있다. 잠결에 들리는 음악이 꿈에 나오기도 하고 잠에서 깰 무렵 나오는 음악이 적절하면 상쾌한 기분으로 기상할 수도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기 전 음악 듣기를 끊으니 아무래도 득과 실이 있다. 더 깊게 오래 잠들 수 있고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이 많지 않고 귀가 피로하지 않다. 다만 음악에 대한 애정과 음악이 삶에 밀착되어있는 정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수면의 질 보다야 중요할까 싶긴 하지만 나에게는 꽤나 중요한 요소였나보다. 드물게 음악 이야기를 할 일이 생겨도 전보다 눈이 반짝거리지 않고 음악 친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0에 수렴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저번 호 금주의 음악 앨범에 썼던 '좋아하는 것들'을 읽은 모순이 나에게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물었다.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에 떠들다가 밴드 '미선이'의 Drifting을 듣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Drifting은 한때 단골 수면 앨범이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놓고 의자에 쪼그려 앉아 Drifting의 첫 트랙 Sam의 첫 가사를 흥얼거리다가 2번 트랙이 시작되기 전에 이부자리로 뛰어들기. 그때 살던 집, 책상과 침대의 배치, 창밖으로 보이던 풍경까지 전부 떠올랐다.
다시 음악을 들으며 자는 삶으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음악을 듣더라도 꼭 타이머를 맞춰놓을 것이다. 그래도 지난 습관으로 남은 기억 덕분에 가끔은 눈을 반짝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금주의 사진
욕실
by 모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보내는 곳. 이른 아침 눈 뜨면 뿌연 유리벽면에 네모낳게 햇살이 맺힌다. 넋을 놓고 보다가 찍어두는 걸 늘 깜빡한다. 이 집에 산지도 햇수로 5년 째. 그사이 집 곳곳에 상처가 번졌다. 화장실 구석, 샤워하는 이곳만이 가장 무사하다. 따스한 물은 하루치 생각을 거품과 함께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