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언어만큼만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은 매혹적이다. 언어학자 벤저민 리 워프는 에스키모인의 언어에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400개가 넘기 때문에 (실제로는 4개 정도라 한다), 그들이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보다 눈을 더 섬세하게 감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국어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세상을 이해하거나 사유할 수 있고, 그 테두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주장이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 그럴싸하고 멋지게 들리지만 현혹에 불과하다. 언어학계에서는 이미 힘을 잃은 이론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반박할 구멍은 넘친다. 한국인들은 흔히 ‘노랗다’의 친구 어휘인 ‘노르스름하다’, ‘누렇다’, ‘누리끼끼하다’ 같은 말을 떠올리며, 이런 미묘한 차이는 외국어로 옮길 수 없다며 한탄한다. 번역이 어려운 건 사실이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다른 언어 화자보다 노란 계열의 색을 더 섬세하게 감지하고 세밀하게 표현해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색채만큼은 (특히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계열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반대로 <햄릿>의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를 떠올려보자. 여기서 ‘be’는 한국어로 ‘존재하다’로 번역되지만, 그 뜻을 정확히 옮길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 화자가 한국어 화자보다 존재에 대해 더 심층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세계 철학사는 영어가 모국어인 철학자들로 그득해야 것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
또 하나, 어느 시인이 제 감정에 딱 포개지는 단어나 표현을 떠올리지 못해서 절규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시인의 감정이 먼저고 언어는 나중이라는 사실도 분명해진다. 아울러 영어에는 ‘눈치’라는 단어가 없지만, 한국에서 몇 개월만 살아도 영어 화자는 ‘눈치’가 어떤 개념인지 알게된다. 심지어 한국인처럼 적확하게 사용까지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언어 이전에 세상을 감각하는 어떤 보편적 감각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언어는 생각의 감옥이 아니며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를 넘어서 세상의 감촉을 느낀다. 우리의 인식은 언어보다 넉넉하다.
물론 언어는 세계를 감지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가 우리 사유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말이나 글이 한 사람의 의견이나 감정을 상대방에게 충만히 전달했다면, 언어는 제 몫을 다한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어에 퍽 인색하다. 문법이 어색하거나 철자가 틀리면 쉽게 입끝을 삐쭉한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일상에서 주고 받는 짧은 글에서 조금만 맞춤법이 틀려도 득달같이 평가한다. 문법이나 철자는 언어의 본질이 아니다. 감정을 나르는 지게일 뿐이다. 심지어 그것들은 몇 세대 만에 그 규칙과 사용법이 바뀌기도 한다. 전문 편집자가 교정해서 출판된 책에서도 비문이나 오타가 발견된다. 그럴 땐 고치면 그만이다. 그러니 너무 쉽게 한 사람의 언어에서 그 감정과 사유의 속살마저 속단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짧은 글 안에 비문이 지나치다거나 말 한 마디로 상처나 감동을 주는 건 다른 이야기다.)
이상 언어를 좋아해서 어떤 책을 읽다가 알게된 잡지식을 적어봤다.
시나리오를 심사하다가 오타를 발견하면 바로 치워버린다는 어느 감독의 말. 소셜미디어에서 우연히 본 그 말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을까.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by 모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