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순의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기로 했다. 모순과 오래 전부터 도모하던 일이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을 미루다 일이 조금 한가해진 겨울이 되어서야 움직였다. 실은 모순도 나도 인스타그램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인간형이라 꽤나 애를 먹었다. 인스타그램 게시물의 비율을 알아보고, 포토샵으로 사진을 편집하고, 컨셉을 정하고.
그간 쌓인 글들을 차례차례 인스타그램에 편집해 업로드하고 있다. 당분간은 매일 1개씩의 게시물이 올라갈 예정이다. 지나간 넋두리와 새로 보내지는 금요일의 넋두리가 작은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언젠가 모호순 사진 글에 창밖을 구경하는 강아지 사진을 업로드 한적이 있다. 하루 루틴에 창밖 구경하기를 끼워넣는 고양이 이야기를 하며 강아지와 고양이를 베껴와야겠다고.
나에게도 습관처럼 자리를 잡고 밖을 구경하는 시간이 있다. 작업실 앞, 학교 흡연장, 지하철 승강장. 휴대전화를 잠시 내버려두고 움직이는 기계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 현상에 상상을 덧붙이다보면 시간이 훌쩍 흐른다.
'발코니 무비'의 감독 파벨 로진스키는 구경에 머무르지 않는다. 발코니 위에서 카메라를 들고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붐 마이크를 가져다 대고 말을 건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올려다보고 각자의 이야기를 해준다. 찰나로 끝날 현실 속 행인들이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캐릭터'가 되고 조각 같은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결국 말을 걸어야 알 수 있다. 말을 걸지 않고 매일 같은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모아 둔 푸티지를 편집했어도 영화가 되었을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서 성취해낸 주제에는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 수직으로 떨어진 거리를 두고 이뤄진 인터뷰는 2년 반의 기간, 천 여명의 행인을 대상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이뤄졌다. 팬데믹 이후에 완성된 영화는 덕분에 다큐멘터리 작법에 대한 접근 뿐 아니라 '소통'에 대한 맥락까지 확장되어 읽히기도 한다.
금주의 음악 앨범
아침놀
by 모호
트랙리스트
1. 산
2. 우리는 항상 거추장스러운 꿈을 꾸고
3. 송가
4. 비 오는 날
5. 오후
6. 틈
7. 캄캄한 곳에서
8. 차양
9. 죽은 새
10. 아침놀
앨범 아침놀
아티스트 khc
발매 2025
길이 35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khc의 신보 아침놀을 들으며 아침 열차를 타러 갔다.
11월의 끝, 12월의 시작 즈음 외할머니댁엔 연례행사가 벌어진다. 다음 해 가족들이 먹을 김치를 쌓아두기 위해 할머니는 김치속을 만들고 절인 배추를 준비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할머니가 나이 드실수록, 또 이모와 삼촌, 사촌 동생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바빠질수록 김장 때에 모이는 가족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올해는 특히나 짐을 나를 사람이 없다는 할머니의 한탄에 일찌감치 일정을 비우고 카메라를 챙겨 아침 열차에 올랐다.
제법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맡으며 오랜만에 서울역으로 향했다. 한동안 직접 운전해 내려가 버릇하니 아침 서울역의 풍경이 제법 생경했다. 어지럽게 엉킨 승강장 입구와 길게 줄지어 있는 그 옆의 빵집, 고요한 듯 시끌벅적한 아침 역의 풍경에 어울리는 앨범을 골랐다. khc의 아침놀. 연약해보일만큼 투명하고 섬세하게 쌓아올려진 악기음이 노이즈캔슬링 된 헤드폰 안으로 흘렀다. 묘하게 어우러지다가도 어긋나는 음악과 풍경. 열차에 올라 짐을 한 켠에 정리해두고 자리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흘러가버리듯 얹어진 보컬이 귀에 들어왔다. 앨범을 반복 재생해두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정읍역은 한 구석에 틀어져있는 텔레비전 소음을 제외하곤 고요했다. 짐을 들고 부스럭대는 내가 가장 시끄럽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읍역을 나서 한달음에 집으로 향했다. 아침 9시가 겨우 된 시간이었지만 이미 김장은 시작했다. 마당에 절인 배추를 쌓아두고 할머니와 엄마, 이모가 김치 속을 채우고 있었다. 얼른 카메라를 세팅해 한 구석에 세워두고 일손을 도왔다. 김치를 붉게 물들이며 나누는 대화들에 웃음을 터뜨리고 절인 배추를 조각내고 한점씩 맛을 보고. 절인 배추가 금방 바닥을 보이고 대신 마당 한쪽에 가득 찬 김치통이 쌓여갔다.
수육과 김장 김치만으로도 충분한 점심을 먹고 할머니가 따로 담아준 김치통을 챙겨 다시 서울로 향했다. 한바탕을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플랫폼 한쪽에 쪼그려 앉아 다시 아침놀을 재생했다. 바닥을 보고 있었던가, 아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던 것만 같은데. 김치통이 담긴 가방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기차가 도착해있었고 한쪽 구석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승무원이 톡톡 건드렸다. 기차가 도착했다고. 나는 허겁지겁 짐을 챙겨 기차에 올랐다. 감사하다는 말도 허겁지겁. 묵직한 김치통을 발밑에 조심히 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내년의 김치가 다시 이렇게 채워지게 되었구나, 한해가 이렇게 가고 또 오는구나. 해질녘이 된 바깥 풍경에 아침놀 앨범이 썩 잘어울렸다.
금주의 사진
귀여워
by 모순
포실포실한 볼이 귀여워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옆의 아이는 조금 자랐다고 분홍 드레스를 입었고 머리에도 모양이 생겼다. 두 아이는 노인의 품에 안겨 있다. 아마 할머니와 할아버지일 것이다. 두 노인은 앉아 있고, 그 뒤로 서 있는 젊은 사람들이 빽빽하다. 아이도 노인도 모두 앉아 있지만, 그 이유에는 길고 넓은 시간의 간격이 자리한다. 그 시간 가르는 듯 공교롭게도 작은 훈장들은 아이와 노인의 중간쯤에서 달려있다.
두 아이는 주름 깊은 손에 감싸여 있다. 포용과 따뜻함은 마치 한 생을 버텨낸 뒤에야 비로소 영글어 맺히는 결실인듯, 서 있느라 바쁜 젊은이들은 아직 아이를 온전히 품기엔 마음의 여백이 부족한가보다. 의자에 의지하면 마음에도 자리가 생겨서 그 여백에 사랑이 차오른다는 지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갓난아기는 편안하다. 흐릿한 초점으로 볼살의 포동함을 더욱 도드라지고, 무해하다. 귀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