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원에게 두 문장으로 된 부탁을 건네자 목이 갈라졌다. 유행한다는 감기 탓인가 싶었지만 곧 깨달았다. 사흘째, 나는 간단한 주문 외에 소리내어 말한 적이 없다. 부산이다. 올해만 해도 여러 번 여행을 다녀왔지만, 내가 원해서 떠난 적은 없었다. 일 때문이거나 친구가 가자고 제안해서 떠났었다. 그러니까 올해의 여행들은 밖으로부터 시작됐다.
몇 개월 동안 이어진 프로젝트가 끝나자 몸은 헝겊처럼 닳았다. 그럼에도 나는 또 여행을 왔다. 와서야 알았다. 온전한 혼자가 필요했다. 혼자 과거도 미래도 없는 곳에서 오직 현재만을 마주하는 나날.
말을 하지 않을 뿐, 머릿속은 분주하다. 돌이켜보자. 벌써 11월이다. 마음 아픈 일이 있었다. 옅게나마 가슴 벅찬 일도 있었다. 일상의 급류 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크고 작은 감정들을 하나씩 끌어 올렸다. 쓰렸다가, 부풀어올랐다가, 저몄다가, 차가워졌다가, 따뜻했다가, 다시 압도됐다가. 수식이 어려운 감정들이 변주하고 진동해서 메스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꼭 씹어 삼켜야 건강해진다. 유치원 때 배운 교훈처럼.
감정이 날아간 것들은 노트에도 적어본다. 올해 끝내고 싶은 것, 내년에 하고 싶은 것. 페이지를 넘긴다. 적당히 노곤하고 지쳤다. 가게의 불빛은 정확히 노트 위에서 박살나고, 덕분에 집중이 잘된다. 평소라면 몇 번은 주위를 둘러봤을 텐데, 오늘은 고개가 들리지 않는다. 자리도 좋고, 직원도 친절하다.
앞 페이지를 다시 들춰본다. 웹페이지 구성, 상영회 형태 그리고 방금 극장에서 본 영화 탓에 떠올라버린 영감. 이 족쇄에 또 걸려들었다. 큰돈 들이지 않고도 어쩌면 근사한 영상작업을 할 수있을 것만 같다. 메피스토와 또 만나버렸다. 지네 같은 이 손글씨가 내일 키보드로 옮겨지면 글자들로부터 무언가가 탈락하고 말 것이다. 그럼 언젠가 그것을 되찾으려 나는 또다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
by 모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