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상대적이다. 어떤 때는 제멋대로 달려나가다가도 또 어떤 때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자리를 잡고 머물러있다. 서울에선 유독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모두가 바삐 움직여서 그런 건지. 그들을 부지런히 쫓기 위해서 시간과 발 맞춰 뛰다 보면 몇 시간이, 또 며칠이, 또 몇 년이 훌쩍 지나가있다. 올해는 유독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오늘의 날짜를 확인할 때, 혹은 새로운 계절이 훌쩍 다가올 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이니. 시간의 질감을 미처 느끼지도 못할 새에 올해의 마지막 달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주는 독하다는 올해의 독감에 걸렸다. 주말부터 몸이 으슬으슬 춥고 쑤시더니 한주 내내 기침이 나오고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독감을 핑계삼아 몸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잠을 잤다. 움직여야만 할 시간에 움직이지 않고 시계를 봐야만 할 시간에 시계를 보지 않으니 빛으로만 시간을 어림잡곤 했다. 약사 선생님이 준 약의 마지막 줄을 먹고 나서야 다시 서울에서의 시간에 올라탔다. 자꾸만 발이 어긋나 쫓기가 벅찼다.
그래서일까. 이번 주는 촬영을 핑계삼아 훌쩍 정읍으로 떠나왔다. 할머니와 시간에 맞춰 하루를 보낸지 나흘 째. 이곳의 하루는 평소 나의 서울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되어 훨씬 일찍 끝난다. 얕은 잠에서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아침 소리와 아홉 시면 전부 꺼지는 집안등. 언제나 틀어져있는 텔레비전 소리는 시간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처럼 그 사이의 시간들을 실처럼 늘인다. 정읍에서의 시간에는 발 맞추기가 어렵지 않았다. 시간은 참을성있게 나를 기다려줬다.
곧 다시 서울로 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의 시간 틀에 맞춰 바삐 연말을 맞이할테다.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서울의 시간에 잘 올라탈 수 있으련지. 두려움을 뒤로 하고 다시 그와 발맞출 준비를 한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비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특별하게 기억하는 비가 있을지도 모른다. 비 오는 어느 날의 기억을 오래 붙잡고 있으며 또 비가 내릴 때마다 그 기억을 스치듯 떠올릴지도. 비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젖은 흙냄새와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좋아해 바지 밑단이 젖으면서도 내심 비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라는 당연한 현상은 그렇게 모두에게 특별해진다.
요리스 이벤스에게도 비는 특별했던 모양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비'다. 비가 오기 전부터 오고 난 후까지의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이미지로 일상적인 공간과 현상을 이으며 카메라가 포착한 반짝이는 순간을 모두의 것으로 공유한다. 겪어본 적 없는 그때의 그 공간을 섬세히 누비는 이미지를 보고 있다 보면 각자의 비를, 또 각자의 비의 이미지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특별한 일을 기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보면 당연한 일상에는 무뎌진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열차, 매일 마주치는 사람과 매년 돌아오는 계절, 날씨 같은 것들. 당연하지만 실은 모두에게 특별한 '무엇'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사람이 좋다. 그리고 그런 영화가 좋다.
금주의 음악 앨범
Since I Left You
by 모호
트랙리스트
1. Since I Left You
2.Stay Another Season
3. Radio
4. Two Hearts in 3/4 Time
5. Avalanche Rock
6. Flight Tonight
7. Close to You
8. Diners Only
9. A Different Feeling
10. Electricity
11. Tonight May Have To Last Me All My Life
12. Pablo's Cruise
13. Frontier Psychiatrist
14. Etoh
15. Summer Crane
16. Little Journey
17. Live at Dominoes
18. Extra Kings
앨범 Since I Left You
아티스트 The Avalanches
발매 2000
길이 60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샘플링 앨범을 들으니 Since I Left You가 듣고 싶어졌다.
요즘 '시스템 서울'이라는 아티스트가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한동안 힙합에는 관심을 끊고 있던 나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이니. 주로 가요를 샘플링한 그들의 앨범을 듣고 있자니 내가 좋아했던 세밀한 샘플링 앨범이 몇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The Avalanches의 Since I Left You. 최근 앨범도 너무도 좋지만, 이들의 첫 앨범인 Since I Left You는 성실하게 음악을 듣던 때를 회상하게 한다.
Since I Left You는 아주 끈질긴 앨범이다. 음악 뿐 아니라 코미디 쇼나 인터뷰의 일부분을 샘플링 해오기도 하는 등 약 3500개의 샘플이 한 앨범에 쓰였다. 앨범은 수많은 샘플 조각을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묶어낸다. 좋은 샘플링 앨범이 그렇듯 샘플들은 과시와 번뜩임만을 위해 쓰이지 않고 적재적소에, 또 창의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Avalanches는 그 하나의 이야기로 항상 '사랑'을 선택한다.
한창 이 앨범에 빠져있을 때는 사용된 샘플이 궁금해 샘플의 원곡을 찾아내주는 사이트에 한곡 한곡을 검색해보며 이 샘플이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하곤 했다. 한 앨범과 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사용된 수많은 레퍼런스와 그들의 자양분이 됐을 샘플들을 보고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조차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도 자연스레 내가 보고 듣던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미지를 보면 문득 떠오르는 음악이 있고, 음악을 들으면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결국 내어보일 수 있는 건 내가 알고 있는데까지. 언제쯤 내가 작지 않게 느껴질련지, 하는 한탄과 함께 아래에 샘플을 찾아주는 사이트를 첨부한다.
불완전한 것들에 마음이 간다. 알 수 없는 영역을 마음껏 상상하면서, 이랬으면 저랬으면, 결여된 부분을 채워본다. 그럼으로써 완전을 꿈꾼다. 완전과 완벽을 찾는 것이 본능이라면, 우리 삶이 필연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좇아도 결국 현실에서는 완전과 완벽을 맛볼 수 없다. 부조리다. 그토록 원하지만 결코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부사는 인간의 모든 언어사전에 등재돼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것은 정말 불안하고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채워보고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