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뻔한 말이, 잘려나간 머리카락의 길이와 뭉치 속에서 새삼 쓸쓸한 감정을 얻고 있었다. 바닥은 하얬다. 검은 머리카락은 더욱 도드라졌다. 흔히 달력으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지만, 시간은 몸에도 드러난다. 몸의 변화는 대부분 더뎌서 사진으로야 확인되지만, 손톱과 머리카락은 빠르다. 그러나 손톱은 지나간 시간을 가늠하기엔 너무 자주 잘려나간다. 머리카락은 다르다. 마음먹으면 몇 년이나 몸에 붙인 채 생활할 수 있다.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고 나도 여느 사람처럼 1~3개월에 한 번 머리를 자른다. 미용실 바닥에 떨어진 검은 털의 뭉텅이가 지나온 시간을 시각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또 몇 개월이 흘렀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알싸한 감정이 밀려오는 건 가위질 한 번에 허무하게 잘려나간 과거가 묻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과거 자체에 달린 나의 무력감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머리를 만지고 있는 건 한 청년이었다. 스물여섯쯤 되어 보이는 외모와 스타일이 참으로 동시대적이었다. 거울에 비친 나와 그 청년의 대조는 또 한 번 흘러간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느새 십 년이 지나갔다. 그는 서툰 손짓으로 내 머리를 뒤적이고 있었다. 조수였다. 바닥에는 내 머리뿐만 아니라 아직 치우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머리카락도 보였다. 여러 사람의 잘려 나간 시간이 뒤섞여 있었다. 아마 문밖에서도 나는 저 머리카락의 주인들과 시간을 섞어 생활해 나갔을 것이다.
이 미용실에 처음 온 건 올해 초였다. 미루고 미루다 해외 출국을 앞두고 급하게 원래 다니던 곳을 예약하려 했으나 꽉 차 있었다. 집 근처에 새로 개장한 미용실이 있었고, 마침 오픈 기념으로 30% 할인을 진행 중이었다. 나를 맞이한 건 서른 초반으로 원장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혼자였다. 교양 깊은 말투는 아니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고, 자신감도 있어 보였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뒤로 원래 미용실과 이곳을 번갈아 다녔다. 마지막으로 온 건 두 달 전이었는데, 그날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머리를 자르는 그의 모습에 다음부터는 이곳에만 오기로 생각했다. 가격도 기존 미용실보다 조금 저렴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제는 다른 미용사도 둘 보였다. 저마다 손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약할 때 각자 리뷰도 꽤 쌓여 있었다. 1년 안 되는 시간 만에 나름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그런데 내 머리는 지금 조수가 만지고 있다. 이제 원장은 처음 컷팅과 마지막 손질만 하는 듯했다. 하루에 많은 머리를 깎을수록 수익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일 테니, 가능한 한 예약을 많이 받았겠지. 바빠서인지 미처 쓸지 못한 다른 머리카락 옆으로 충전 중인 ‘바리깡’이 보였다. 피부에 닿는 기계가 바닥에 충전되는 모습에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조수는 그런 나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수 청년은 기본적으로 상냥했다. 머리를 감겨 주며 잠시간의 나의 행동과 모습에서 칭찬할 만한 점들을 발견해냈고 말해주었다. 머리를 말려 주며 시간을 채우기 위한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 대화가 한 번도 기억에 남은 적은 없다. 머리가 마르자 원장 청년이 왔다. 그는 세심하게 머리를 다듬어 갔다. 자신의 의견도 덧붙여 몇 군데를 더 잘라냈다. 머리가 완료됐고, 그는 숙달된 톤과 문장으로 나를 반갑게 내보냈다. 앞으로 몇 번은 더 오겠지. 엘리베이터 거울 속 내 모습에 흘러버린 미용실의 시간이 잘려 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