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호다. 10 단위의 모호순이 나올 때마다 시간을 체감하곤 한다. 숫자 하나에 한 주. 벌써 40주의 시간이 흘렀다니. 새벽 6시 발송이라는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는 나지만 (오늘도 지각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주 무엇이든 쓴다는 사실이 은근하게 나를 지탱하고 있다. 과거에는 글의 힘을 믿었다. 특히 기억을 글로 구성해 늘어놓을 수 있게 됐을 때 느껴지는 안도감이 있었다. 지난 글을 읽었을 때, 지나가고 또 여전한 것들이 활자로써 포개어져 착실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삶을 더 실감나게 했다. 지금도 글의 힘을 믿나. 예전만큼은 아닌 것 같다. 매주 모호순을 쓰고, 또 여러 형태의 글을 쓰지만 나는 분명 6년 전 네이버 블로그를 쓸 때보다 덜 솔직하고 조심스러운 것들이 많아졌다. 이번 주에는 이동하는 길이나 잠시 시간이 빌 때 모호순을 역순으로 한 호씩 읽었다. 마음을 꽤나 첨가했던 주도, 그렇지 못했던 주도 있었다. 읽는 이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모두 생생하게 기억했다. 퀄리티보다 일단 보낸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모호순을 쓰기 시작한 초기, 매주 모호순 글을 쓰며 끙끙거리는 나에게 '모순'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땐 더 괜찮고 읽을 만한 글을 써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맞다. 괜찮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도 나는 매번 그럴 수 없고, 한편으로는 별 생각 없이 썼던 호가 지나고 나서 읽어보면 꽤 솔직하고 재밌었던 적도 있다. 공들여 다듬기 전에도 대뜸 쓰기. 글을 다시 믿고 싶다.
코야니스카시는 '균형 깨진 삶'을 의미하는 인디언의 언어이다. 영화는 고대 인디언의 벽화에서 출발해 자연, 인간, 그리고 발전에 이르기까지의 영상들을 말없이 보여준다. 말이 없는 대신 <코야니스카시> 에는 음악이 있다. 필립 글래스가 맡은 음악은 몽타주되는 컷들과 어우러진다.
특별한 내러티브도 없지만 이 영화는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풍경들을 보고 있자면 작은 맥북 화면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제목의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영화는 균형 깨진 자연과 도시 속 인간에 대해 말한다. 자연에서 시작해 인간에 이르기까지. 컷들의 조화와 조응으로만 영화는 어렵지 않게 질문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결국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 그리고 편집된 것. 쉬운 두 가지 사실을 충실하게 이용해 <코야니스카시>는 영상 매체의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가급적 큰 화면으로, 좋은 음향 환경과 조용하고 어둡고 혼자 있는 곳에서 이 영화를 보길 추천한다.
금주의 음악 앨범
Modal Soul
by 모호
트랙리스트
1. Feather
2. Ordinary Joe
3. Reflection Eternal
4. Luv(sic.), Pt.3
5. Music is Mine
6. Eclipse
7. The Sign
8. Thank you
9. World's End Rhapsody
10. Modal Soul
11. Flowers
12. Sea of Cloud
13. Light on the Land
14. Horizon
앨범 Modal Soul
아티스트 Nujabes
발매 2005
길이 63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누자베스를 한 번쯤 플레이할 계절이 오고 있다.
추운 날씨와 누자베스라니. 과거의 나라면 징그러울 정도로 식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겨울에 누자베스를 본격적으로 들어본 적이 있던가. 몇 번의 겨울들이 지나가지만 그곳에 누자베스가 틀어져있지 않다. 오히려 다른 기억과 음악이 재생된다. 2022년 겨울, 한창 박지혜 시인의 시에 빠져 시집을 몇번이고 반복해 읽을 무렵이었다. 그의 시집에는 겨울 시 여섯 편이 이어진다. 그중 겨울 감정이라는 시에 시드 비셔스의 사진 이야기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 이야기가 지나간다. 겨울 내내 여섯 편의 겨울 시에 갇혀있다가 이런 글을 썼었다.
겨울은 그런 식이다. 섹스 피스톨즈의 anarchy in the UK가 앰프 찢어지게 틀어져 있는 방과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candy says가 밤색 스피커에서 흐르는 방. 냉탕과 온탕처럼, 그런데 온탕에서도 가끔 춥고 냉탕에서는 가끔 따뜻한, 그런 식이다.
지금 보면 누자베스가 식상할 건 뭔지, 벨벳 언더그라운드도 만만치 않게 식상한데,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누자베스에 대한 이미지, 스스로 만든 것인지 혹은 어딘가에서 습득한 것일지 모르는 그 이미지 때문에 누자베스를 피해온 게 아닐지.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고백하자면 별 생각 없이 누자베스의 음악을 재생했다. 저번 주말, 파주로 가는 운전길에 정말 아무 이유없이 누자베스가 오랜만에 듣고 싶어졌다. 놀랍게도 나의 애플 뮤직 보관함에는 누자베스가 저장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검색창에 누자베스를 검색하고 아무 앨범을 플레이했다. 따뜻하고 먹먹한 비트와 서정적인 멜로디와 랩이 외부 소음과 섞였다. 이상한 해방감이 들었다. 나는 이제 누자베스도 아무렇지 않게 틀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 문장이지만 나는 이제 정말 누자베스를 아무렇지 않게 틀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금주의 사진
청바지
by 모순
몸 구석 맺힌 송글한 땀은 볕이 아니라 습도 때문이다. 습도는 도도하고 은닉해서 과연 여름의 본모습이다.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흑청 긴바지와 다리 피부 사이가 끈적하게 비벼대는 탓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결국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왔다. 허벅다리 사이로 바람이 오간다. 통풍은 습도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 그럼에도 강력하다. 졸병같다고나 할까. 그 수가 많아지는 만큼 강력해지는 졸병들처럼, 바람이 드나드는 면적이 넓어질수록 습도에 효력적으로 대항한다.
이런 잡념을 하며 멍하니 서있다가 짐을 나르는 두 사람이 눈 앞에 맺혔다. 두 남자는 훈련된 모양새로 분주하다. 둘 다 청바지를 입고 있다. 청바지의 질긴 면조직은 다리를 감싸안고 외부로부터 상처를 보호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육체는 무엇보다 중요할 테다. 몸에 상처가 나면 내일 일할 수 없다. 두 다리의 걸음 따라 유연하게 벌어지는 청바지의 합목적적 움직임에 괜스레 스스로가 사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