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더니 하루가 다르게 아침이 시리다. 여름 내내 넣어뒀던 가을 옷을 꺼내입고 시린 아침을 맞는다.
이제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랜 친구 중 하나가 신용산역 부근에 직장을 구했다. 작업실이 위치한 충무로와 거리가 멀지 않아 가끔 같이 저녁을 먹곤 한다. 둘이 저녁을 먹으면 술 한잔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술이 들어가면 각자 고민에 대한 이야기가 9할이 넘어간다. 한창 대화에 열을 올리다 내일의 출근과 내일의 할일을 위해 적당히 헤어지고.
혼자 남아 집에 가기 전에 작업실에 잠깐 앉아 있으며 '날이 참 춥네' 중얼거렸다. 그러곤 둘이 나눈 대화 중 고민들에 대해 복기해본다. 결국 조급함이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전력질주에만 익숙해져서, 혹은 이제 곧 서른이라, 혹은 타인 때문에. 고민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우리는 조급함에 대해 말했다. 원인을 알고 있는 질병을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니.
옷을 꿰어 입고 작업실을 나섰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혹은 앞섶을 단단히 여며서 그런지 아침보다 춥진 않았다.
암스테르담에서 이 영화를 봤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실은 암스테르담에 머무는 대부분의 날에는 비가 내렸는데, 이날은 우박이 섞여 내리기도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이동했다. 트램을 탈수도 있었지만 걷기로 했다. 우산을 쓰지 않고 외투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모자 위를 툭툭 건드리는 빗줄기가 간지러웠다. 30분이 넘는 시간을 걸어 암스테르담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강에 도달했다. 생각보다 걷는 시간이 길어져 페리를 탔을 무렵에는 이미 영화가 시작됐다.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이미 영화가 시작된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조심스레 극장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을 수 없어 비어있는 맨 앞자리로 향했다. 겨우 몸을 의자에 기대고, 스크린을 올려다봤다. 이미 시작된 영화에선 이미지가 들이치고 있었다.
<동물, 식물, 광물>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세 가지 챕터로 구성된 영화다. 순서대로 동물, 식물, 광물. 가장 살아움직이는 주체에서부터 가장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체까지. 영화는 에세이 필름이라 불리우는 영화들에서 자주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전개한다. 다만 나레이션의 사용은 최소화하고 매우 정적인 이미지들의 배치를 연속적으로 사용한다. 인상적인 점은 각 챕터의 범주인 동물, 식물, 광물에 대해 명확한 주제를 가지고 이미지를 쌓는다. 특히 동물 챕터에서 전개하는 아카이브 이미지에서 식물 챕터로 넘어가며 등장하는 유려한 촬영 푸티지가 이어져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각 챕터의 소주제와 전체를 엮는 대주제는 명확한 편이다. 비인간주체들의 주체성과 그들의 인간과의 연결성을 가능한 끌어올려 하나의 지위를 갖게 하고자 영화는 3시간 반이란 시간 동안 끈질기게 노력한다.
금주의 음악 앨범
Microcastle
by 모호
트랙리스트
1. Cover Me Slowly
2. Agoraphobia
3. Never Stops
4. Little Kids
5. Microcastle
6. Calvary Scars
7. Green Jacket
8. Active
9. Nothing Ever Happened
10. Saved By Old Times
11. Neither of Us, Uncertainly
12. Twilight At Carbon Lake
앨범 Microcastle
아티스트 Deerhunter
발매 2008
길이 40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사랑에 빠지게 될 앨범은 1번 트랙에서 정해진다고 믿는다.
탑스터라는 사이트가 있다. 음악,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카테고리에서 본인만의 최고를 꼽는 사이트인데, 이곳에서 애정하는 앨범들을 꼽아 취향을 전시하는 행위는 오랫동안 꾸준히 인터넷 세상에서 이뤄지고 있다. 나도 몇번인가 탑스터를 만들어둔 적이 있었는데, 블로그에 한 번 공유한 것을 빼곤 만들다가 흐지부지되거나 다 만들어놓고 흥미를 잃었다. 그 이유는 최고의 앨범들을 꼽다보면 꼽지 않을수가 없는 앨범들을 꼽다가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 특히 탑스터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것이라는 전제를 상정하고 만들다보면 더욱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탑스터를 만들면서 오히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헷갈리거나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아이러니.
오랜만에 Deerhunter를 들으며 더없이 순수한 탑스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사랑에 빠진 앨범들은 대개 1번 트랙에서 결정되곤 했다. 이 앨범도 그렇다. Cover Me Slowly에서 Agoraphobia로 이어지는 두 트랙의 더 없이 징글징글한 가사와 멜로디. 나로 동일시할 수 있는 음악은 단순히 좋다는 감정을 넘어서는, 분명한 연결이 있다. 전시를 배재하고 탑스터를 만들어봐야겠다. 가능하다면 메일링으로 앨범들을 소개하는 기회가 된다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면 또 전시하는 기분이 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