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아리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잼덩어리가 양쪽에 눌러붙은 듯한 느낌이다. 엉덩이로 걸어야 하는데 종아리로 걸어서 그런 것 같다. 평생에 걸쳐 체득된 걸음걸이를 어떻게 바꾸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
도리가 없는 건 종아리 뿐아니다. 눈 앞에 정리해야할 저것들이 보이지만, 지금 당장 소파에서 일어날 순 없다. 20분 뒤에 또 나가야 하니 그때 쓸 힘을 아껴둔다. 집에 돌아오면 저것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일 것이다. 외면하고 우선 자야한다. 올해 하겠노라고 다짐한 그것들은 또 어떤가. 무엇 하나 해내지 못했다. 끝내 잃어버린 것도 있다.
며칠 전 소설 하나를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일상에 여백을 열어 엿가락처럼 시간을 늘어뜨린다. 감각으로 늘린 시간 속에서 자신과 주변이 서서히 드러난다. ‘아, 눈앞에 이런 것들이 지나가고 있었구나’. 다시 고개를 페이지에 떨군다. 그리고 나선 지하철에서 나와 다시 무뎌진 감각으로 훈련처럼 살아간다.
그래, 다시 소설을 들고 마저 읽자. 현실을 느리게 만드는 가장 빠른 법은 이것 뿐이다. 10월의 나로서는 아직 어찌할 도리가 없다. 종아리가 나 대신 걷는 것 같다.
대학원 입학 전 소위 선배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내 작업을 두고 심도있게, 때로는 전문적으로, 때로는 업계의 시선으로 대화해줄 사람이 없었다.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입학 후 지금은 조금 다르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만든 배가 조각배 수준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떠있는 곳은 망망대해임을 알게 됐다.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다큐멘터리가 실은 소루한 것이었음을, 장편 한 편을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 인력, 금력, 시간이 소요되어야 하는지를, 상업/오락 다큐멘터리는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선 안되거나 못 하는 것임을, 다큐멘터리 장편을 인고 끈에 완성하더라도 소리 소문 없이 지나가게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함을 나는 미처 몰랐었다.
<앱스트랙트> 1편을 지금 보면 소루한 점들이 보인다. 그러나 처음으로 다큐멘터리 세계에 관심을 끌게 한 작품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지금도 가끔 틀어본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시리즈에 대한 욕망의 숨결을 불어놓곤 한다.
금주의 음악 앨범
Sleep
by 모호
트랙리스트
* 트랙이 많아 생략합니다.
앨범 Sleep
아티스트 Max richter
발매 2015
길이 8h 24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잠을 자고 싶다.
한창 잠을 자지 못할 때가 있다. 고민이 많거나 일이 많거나, 하는 이유들도 있지만 그냥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낮과 밤을 바꾸어 살면 여러 문제점이 발생한다. 활동 시간인 낮에는 잠을 자니 누구와도 대화할 시간이 없고, 좀처럼 밖에 나갈 일도 없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한다. 길고 긴 우주 다큐나 클래식, 침착맨 삼국지를 틀어보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막스 리히터의 sleep은 그때 발견한 앨범이었다.
앨범의 길이는 8시간이 넘는다. 딱 이 앨범의 길이만큼 자면 개운하다. 얼마 전 뉴스 기사에서 막스 리히터의 sleep 콘서트가 열린다는, 혹은 열렸다는 소식을 봤던 것 같다.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내 상상 속에서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관계를 굳이 확인하지 않는다) 객석에 침대가 주욱 늘어서 있고 앞에서 8시간 동안 연주하는 동안 잠을 청하는 콘서트였다. 나도 그런 융숭한 잠을 자야지. 이번 주말에는 sleep을 틀어놓고 8시간을 자야지. 방구석 sleep 콘서트를 열어야겠다.
금주의 사진
백반
by 모호
백반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밥과 반찬. 혼자 살다보면 집에서든 밖에서든 한 그릇 음식에 익숙해진다. 한 그릇의 밥이 될 무언가와 간단한 반찬 몇 가지. 식사가 아주 간편해진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백반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다. 작업실 근처의 한 작은 백반집. 기발하고 깔끔한 가게 상호를 보고 지나갈때마다 감탄만 할 뿐 들어가 본적이 없던 가게였다가 어느 날 모순과 식사를 하러 방문했다. 평범한 외관과 달리 안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단골이 꽤나 많아 보이는 가게였다. 평일에는 매일 바뀌는 백반 메뉴와 반찬들. 정신없이 여러 반찬들에 손을 대고, 하얀 밥을 떠먹었다. 결국 일주일 중 사흘을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