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와 함께 하루하루 목덜미를 잡고 있는 외주 작업에 매달리다가, 어쩌다 틈이 나면 ‘우리’ 작업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그로기에 빠졌다. 도피처는 ‘책 가방 없는 날’. 다음 날 오전 11시, 우리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만났다. ‘토킹 헤즈’, ‘다큐멘터리’ 이 두 단어는 충분히 매혹적이었으므로 우리는 극장 자리에 앉았다.
<스탑 메이킹 센스>는 콘서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한 영상이었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인가 아닌가의 골치 아픈 논쟁은 50대의 나에게 던져두기로 하고, 지금 내게 남은 건 데이비드 번의 눈매다. 그의 눈빛은 허공 속을 떠돌다가 점점 또렷해진다. 따라갈 서사나 논리가 없을수록 관객으로서 상상력의 보폭은 넓어진다.
그는 공연 ‘멘트’가 없다. 어쩌면 첫 번째 곡 ‘사이코킬러’에서 이미 말했다.
“When I have nothing to say, my lips are sealed.
Say something once, why say it again.”
가수니까 노래로 한 번 말하면 됐다 이건가. 이러면 노래 순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골똘히 볼 수밖에 없는데.
그의 의상은 어떤가. 목 끝까지 단단히 채운 셔츠와 양복. 심지어 중간에는 우스꽝스러운 ‘특특대’ 사이즈의 옷을 말그대로 걸치고 등장한다. 춤사위는 어떤가. 막춤은 약속된 널럴함이다. 스태프, 코러스, 멤버들과의 호흡을 보면 한 두번 맞춰본 게 아니다. 고정된 마이크에 목을 빼고 빙빙 돌면서 부르질 않나, 요람 속 아기처럼 바닥에 둥실 대질 않나, 음악은 목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야 라는 건가.
아, 한 번 더 멘트를 하긴 했다. “Thank you, does anybody have any questions?” 묻자마자 바로 퇴장한다. 한 번의 공연이면 내가 누군지 대충 알 것이다. 이것이 전달된다면 이 무대자체, 그것을 찍은 영상 자체로도 꽤 괜찮은 전기 다큐멘터리 아닌가 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