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게이트에 도착했다. 지갑이 없다. 집에 돌아가야 하나. 이미 등골에 땀이 넝쿨처럼 흐르고 있다. 돌아갈 힘도 없다. 떠오른다. 아이폰으로 교통카드를 찍을 수 있다는 광고. 재빨리 검색했다. 현대카드만 가능하다고 했다. 난 현대카드 이용자다. 아이폰 지갑 어플을 열어 티머니앱에 현대카드를 연동했다. 게이트 결제패드에 아이폰을 댔다. ‘띡’ 게이트가 열렸다. 다시 떠오른다. 얼마 전 뉴욕 여행 중에도 애플페이로 지하철을 이용했었다. 몇 개월 전인데 아득하다. 그 때의 감정과 풍경이 지금 서울의 것들과 포개지 않는다.
이제 지갑이 없어도 지하철을 탈 수 있구나. 참 편하다. 그럼 앞으로도 핸드폰으로 지하철을 이용할까. 관두자. 내키지 않는다. 또다시 떠오른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 누군가 말하길, 인간의 기억은 공간과 촉각에 밀접하게 얽혀있다고 했다. 책장을 넘기며 느끼는 두터움과 얇아짐이라는 공간감, 지문으로 문질대거나 귀퉁이를 접었던 촉감이 책의 기억을 머리에 조금씩 또박또박 새겨낸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책도 그런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다만 단순하고 한정적이다. 매번 같은 버튼만 딸깍대는 동일한 동작뿐. 단숨에 앞장으로 돌아가서 흐려진 지식을 더듬거나, 귀퉁이를 접거나, 펜으로 때로는 반듯하게 때로는 무차별하게 긋는 행동, 아무대나 펼쳐서 읽는 우발적 독서, 그런 건 안된다.
책을 손에 쥐고 공간과 감각을 이리저리 뒤굴리는 경험이 기억으로 남는다. 이것이 참일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독일의 어떤 과학자가 벌써 인지실험으로 참이라고 혹은 거짓이라고 증명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저 믿고 싶다. 그리고 내 실감과 체험에서는 맞는 것 같다.
유사한 맥락으로 지갑을 꺼내 카드를 꺼내 게이트에 찍어대는 안그래도 이 단순한 동작이, 스마트폰으로 ‘띡’, 이렇게 더 단순하게 끝나버리는 것이 서글프다. 그러지 않아도 시간은 빨리 흘러가서 하루하루 무언가로부터 나도 모르게 멀어지는 듯해서 애처롭다. 지하철이라도 일상의 생략으로부터 구출해야겠다. 어쩌면 이것이 시간과 기억이라는 숭고한 존재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그나마의 것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내일은 꼭 지갑을 챙겨야지.
by 모순
1. 금주의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 by 모순
2. 금주의 음악 앨범
<Debussy> by 모호
3. 금주의 사진
<바깥> by 모호
금주의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
by 모순
제목 익스플레인
길이 편마다 약 20분
관람 넷플릭스
지식을 전달은 다큐멘터리의 오래된 역할이다. 지나간 과거, 개념, 추상이런 종류의 지식을 쉽게 전달해내야만 한다. 설득력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시각적으로 흥미로워야 한다. 짧으면 더 좋다.
<익스플레인>의 에피소드들은 내레이터의 설명과 동시에 아카이브와 비주얼그래픽이 이해를 돕는 동시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도표, 그래픽, 재연, 애니메이션이 빠른 호흡으로 추상적 개념을 손에 잡히듯 풀어낸다. 각 에피소드는 20분 안팎으로 짧지만, 한 주제를 단숨에 요약하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뒤 가볍게 퇴장한다. 크레딧에는 ‘아트 디렉터’가 따로있다. 영상은 협업이다. 그래서 빛나고 그래서 망하거나 그래서 어렵다. 프랑스의 ‘세련된’ 어느 디너 파티에 몇 시간 참여해야 한다면,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비행기내에서라도 보고 갈 것이다.
금주의 음악 앨범
드뷔시
by 모호
트랙리스트
1. Reflets Dans L'eau
2. Hommage À Rameau
3. Mouvement 4. Cloches À Travers Les Feuilles
5. Et La Lune Descend Sur Le Temple Qui Fut
6. Poissons D'or
7. Doctor Gradus Ad Parnassum
8. Jimbo's Lullaby
9. Serenade For The Doll
10. The Snow Is Dancing
11. The Little Shepherd
12. Golliwog's Cake-walk
13. Prélude
14. Menuet
15. Clair De Lune
16. Passepied (파스피에)
17. L'Isle Joyeuse, L.106
앨범 Debussy
아티스트 조성진
발매 2017
길이 72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그날 들을 음악을 고르는 일은 나에게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기분, 상황, 환경 등 온갖 요소들을 고려해 치밀하게, 때론 직감에 따라 앨범을 고르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고른 앨범들 중 몇몇은 나의 한 해를 결정짓기도 했다. 어떤 연도를 떠올리면 금방 앨범이 연상될 정도였다.
요즘은 앨범 고르기에 영 건성이다. 애플 뮤직 보관함의 앨범을 대충 휘적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앨범을 플레이한다. 요즘 손에 잡히는 건 2010년대 한국의 인디 앨범들. 얼마 전의 펜타포트에서 들었던 3호선 버터플라이 때문일까, 너무 많이 들었던 앨범들에서 흐르는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에서 부담없을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져 좋았다.
어쩌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모습이 되어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관성적인 리스너가 되어서 차츰 삶에서 음악이라는 이벤트를 밀어내는.
그런 위기감이 피어오를 때쯤 드뷔시를 듣기 시작했다. 드뷔시를 오래 전부터 좋아해왔거나 그의 음악을 잘 알고 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피아노 연주곡이 듣고 싶어졌고,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아름다운 피아노 멜로디가 드뷔시의 음악이었고, 작업을 하며 듣기에 이보다 마음이 놓이는 음악이 없었다.
며칠 간 내내 드뷔시를 들었다. 작업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따뜻한 물방울 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맴돌았다. 일상적이구나. 다소 건성이어도 되겠다. 안전한 문장들을 녹여 삼키며 2025년을 드뷔시로 떠올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금주의 사진
바깥
by 모호
바깥을 보는 건 강아지에게도 즐거운 일인가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천천히 지나쳐 가며 사진까지 찍는데도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깥을 보는 건 고양이에게도 즐거운 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고양이는 하루의 루틴에 바깥 구경을 끼워넣어 꼭 그 시간마다 창틀에 앉아 있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