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는 연료가 필요하다. 작더라도 글감이 없으면 한창 주변을 겉도는 이야기만 늘어놓게 된다. 핵심이 없는 글을 길게 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으레 쓰곤 하는 문장 구조를 가져오고 몇 가지 쓸데없는 트집을 떠올려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몇 문장 쯤이 완성되어 있다. 그렇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글이 써지질 않는다. 지난 주, 촬영을 위해 방문했다가 아무 것도 찍지 못하고 돌아온 할머니댁 이야기를 할까, 아니면 며칠 전부터 마구 내리는 비에 대해 이야기할까. 할머니댁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지친 눈의 할머니가 내어 준 복숭아와 백숙이 자꾸만 떠오르고, 비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할 얘기가 떨어져 이제 날씨 얘기나 늘어놓는 집착남 2가 된 듯하다.
전반적으로 지쳐있다. 2025년의 반환점을 돈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보약이라도 지어먹어야 하나. 보약으로 전부 해결되면 참 좋을텐데. 쓴 걸 먹으면 꼭 속이 쓰리던데. 이런 허튼 생각이나 이어 붙이며 글을 연다. 기름칠이 되어 있지 않은 문 손잡이에서 나는 소름끼치는 쇠붙이 소리가 머리에 울리지만 무시하며 힘차게 문을 연다.
타네이션의 주인공은 감독 조나단 카우에트다. 감독은 본인의 불행에서 한 발짝 떨어져, 하지만 동시에 끈덕지게 응시하면서 자기 고백을 이어간다. '나'라고 발화하지 않으며 '조나단'의 심정을 영상 언어로 말한다. 분열되고 열화된 화면, 이야기와는 다른 무드의 음악은 '나'의 감정을 언어로 풀어내지 않아도 느껴지도록 한다.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 작업은 강한 질문에 도전받곤 한다. 무엇이 진짜 '나'일지. 재현의 대상이 '나'이기에, 적어도 타인보다는 나는 '나'를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연민하고 싶어질 때도 있고. 나를 이용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 나를 인물로 만들어야 하기에 동반하는 두려움과 위선들이 무섭게 덮쳐온다.
결국 지독하게 내 삶을 사랑해야만 할 수 있는 작업이다. 조나단 카우에트는 그랬다. 영화를 보고 남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그가 그의 삶을 놓지 않고 지겹게 붙잡아 이야기로 만들어냈기에 피어오를 수 있었다. 두려움과 위선까지 모두 직면해 찍어내고, 편집해냈기에. 세상의 모든 '나'의 이야기에 지지를 보낸다.
금주의 음악 앨범
접속
by 모호
트랙리스트
1. Candy Says
2. What Goes On
3. Some Kinda Love 4. Pale Blue Eyes
5. Jesus
6. Beginning to See the Light
7. I'm Set Free
8. That's the Story of My Life
9. The Murder Mystery
10. After Hours
앨범 The Velvet Underground
아티스트 The Velvet Underground
발매 1969
길이 44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멜로 영화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극의 목적, 또는 주제가 오로지 사랑이라서 오히려 단순한 영화를. 현실에서는 절대 단순화될 수 없고 그 실체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사랑은 멜로 영화에서 아주 뚜렷하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진 않다. 사랑의 형체 없음이 역설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형체를 갖추든 이야기로 가능하게 한다. 영화 '접속'은 온라인으로 사랑에 빠지는 두 인물을 그린다. 앞서 말한 사랑의 형체 없음 속성과 비슷한 '온라인' 상에서의 사랑. 이 앨범의 수록곡 Pale Blue Eyes는 극중에서 사랑의 도화선이 된다.
고백하자면 중학생 때 좋아하던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제목 참 지독하다) 때문에 울룰루를 가보고 싶어한다. 영화 '접속'의 씬을 편집해 음악을 삽입하여 뮤직비디오를 만든 적이 있다. 나의 첫 편집이었다. 사랑을 갈구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세상 이야기의 8할이 사랑 이야기라며 지겨운 척 했지만 집에선 멜로 영화를 챙겨봤던 것처럼,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사랑을 쥐어보는 허튼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다.
영화 '접속'의 마지막 씬에서 한석규와 전도연은 마침내 서로를 알아본다. 그러고 웃는다. 멋쩍기도 수줍기도 한 웃음을 지으며 말 없이 마주 서 있는 모습을 카메라는 길게 비춘다.
금주의 사진
덩어리
by 모순
복잡하고도 단순하다. 덩어리로 인식하면 난잡성은 구조로 들어간다. 때로는 감각과 감정도 그러면 좋으련만 하루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이뤄지지 않고 연속된 시간이다. 단 한번도 끊기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