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의 탄생>을 즐겁게 읽고 있다. 재독 중이다. 재밌는 책은 더 재밌고 싶어서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는다. 몇 년이 흐르고 다시 읽으면 새로운 게 잡힌다. 참 신기하다. 문장도 주제도 그대로 일텐데. 내가 변한 것이다. 관심사, 인식, 고민 등이 처음 읽었을 때와 달라진 것이다. 이번에는 ‘전제’라는 개념이었다.
전제란 논증을 전개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굳이 설명하지 않는, 숨겨진 추론의 기반이다. ‘우리는 대학교에 등록금을 낸다. 돈을 내면 고객이다. 그러니 대학교는 학생을 고객처럼 대하고, 고객인 나에게 돈 값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라는 주장은 합리적으로 들린다. 전제를 따져보면 바로 까다로워진다. ‘근데 왜 돈을 내면 꼭 고객이야?’, 여기서부터 생각을 시작해봐야 한다.
논증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이 바로 전제다. 누군가의 전제를 발견하는 것도, 내 생각의 전제를 설명하는 것도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학술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전제는 일종의 믿음, 신념, 정체성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논증만으로 전제를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무신론자는 노벨수상급 논리로도 유신론자를 설득할 수 없다. 반대로 전제가 같거나 비슷하면 대화는 편해진다. 그 전제가 하나의 집단에 퍼져있으면 우리는 문화라 부른다. 문화의 가장 작은 단위는 친구이고, 가장 작으면서도 긴밀한 단위는 연인이다. 세월에 걸쳐 공유된 전제가 넓고 깊어질수록 관계는 부드러워진다. 그 전제가 문화가 되고, 때로는 사랑이 된다.
또 하나, 좋은 작품들의 한 가지 특성을 말할 수 있게 됐다. 내가 봤던 좋은 작품은 행동의 촉구보다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내 안의 무언가를 한발짝 한움큼 파내었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특징을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전제의 통찰’이다.
라고 혼자 생각하며 <논증의 탄생>을 즐겁게 읽고 있다.
by 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