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업을 위해 모순과 함께 보광동의 재개발 구역을 답사했다. 철거 직전인 우사단로에는 전부 빈집이었다. 유리창은 깨져있고 바깥에서 화장실 내부가 들여다보였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건물 안에서 용도와 사람을 상상해볼 뿐이었다. 사람, 그렇다 사람이 궁금했다. 옆 건물과 이어진 옥상에서 그들은 무슨 안부를 나누었을지. 옥상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꼭 집을 거쳐야만 하는 독특한 구조의 집 안에서 어떤 저녁을 보냈을지. 그들은 어디에서 와 이제 어디로 갔을지. 폐허가 된 공간에서 온도를 느끼려 노력하면서 다시금 생각했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부분은 때로 전체가 되기도 한다.
카메라는 마치 인간의 뇌를 헤집듯이 도서관의 곳곳을 소개한다. 책은 기억. 기억이 차곡차곡 쌓인 인간이 하나의 유기체로 기능하듯 도서관 역시 잘 정리된 책들이 모여 유기체로 작동한다. 공간에 대한 알렝 레네의 다큐멘터리 '세상의 모든 기억'은 제목처럼 도서관 속 기록들을 '기억'으로 간주한다.
기록에 광적인 사람들이 있다.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하루의 감정이 아닌 사실 위주의 일기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잊기 위해 일기 쓰기를 그만둔 입장에서는 경외롭기도 하다. 그의 집에는 기억의 도서관이 책장에 있을 것이다. 네이버 뉴스 아카이브를 뒤져보며 기록과 보존의 중요성을, 그리고 기록의 행간을 주의깊게 바라보는 일의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내가 직접 실천하기란 어렵다. 나의 뇌에는 중간 중간 백지로 된 책들이 꽂혀있을 것이다.
백지가 없다면 나에겐 너무 많은 기억이 있겠지. 저 도서관처럼 나는 모든 기억을 수집하고 관리할 수 없겠지. 그럼에도 더 자세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언어로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순간들이 있다. 일기를 다시 써볼까. 이미 올해의 다이어리를 사기에는 늦었는데. 빈 공책에 써봐야겠다. 이런 뜬구름을 잡으며 기억을 기록으로 잡아두는데에 실패하곤 한다.
금주의 음악 앨범
전시회에서의 음악
by 모호
트랙리스트
1. Tone Bone Kone
2. Soon-To-Be Innocent Fun / Let's See 3. Answer Me 4. Being It
5. Place I Know / Kid Like You
6. She's the Star / I Take This Time
7. Treehouse
8. See-Through
9. Hiding Your Present From You
10. Wax the Van
11. All-Boy-All-Girl
12. Lucky Cloud
13. Tower of Meaning / Rabbit's Ear / Home Away From Home
14. Let's Go Swimming
15. The Name of the Next Song
16. Happy Ending
17. Canvas Home
18. Our Last Night Together
앨범 World of Echo
아티스트 Arthur Russell
발매 1986
길이 70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오디오가 없는 전시를 보러 갈때면 음악을 고르는 일에 공을 들인다. 어떤 음악이 이 전시에 어울릴까, 오늘 기분에 적절할까 고민하는 일이 즐겁다. Arthur Russell의 World of Echo는 자(타)공인 최고의 전시 음악이다. 전시장이 아닌 곳에서 이 앨범을 들으면 어딘가 허전할 정도로.
전시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은 머무를 수 있을 만큼 머물며 딴 생각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러닝타임동안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눈과 귀를 내어주어야 하는 영화와 달리. 물론 영화를 훨씬 사랑하지만 가끔은 산책하듯 전시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때로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다른 작가들의 작업을 보기 위해 전시를 보러 가기도 한다. 사유는 다양하지만 전시를 보는 시간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그때마다 감각할 수 있다.
특히 음악을 들으며 전시를 보는 경험은 특별하다. 귀에 자극을 주면서도 공간과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음악에 World of Echo는 아주 적절하다. '아방가르드 음악'이라는 표제를 떼고 Arthur Russell의 음악을 생각한다. 보컬이 얹어진 이 앨범은 약간의 탄성과 거침을 가지고 있는 샤워타월에 부드러운 비누 거품을 묻혀 몸을 씻어내는 것과 같은 질감을 가졌다. Arthur Russell도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왜 특별한 음악들은, 그리고 사람들은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만 하는지. 나는 그런 음악에 얼마든지 귀를 내어준다.
금주의 사진
사진의 순기능
by 모순
어제 받은 사진이다. 아날로그로 찍어서 디지털로 결과물로 받는 일은 언제나 어색하다. 나에게 전해졌던 감각이 ‘0과 1, 있거나 없거나’라는 중간값 없는 데이터라는 체계 속에서 과연 온전히 남을까라는 직관적 의혹 때문일 것이다. 내게 남은 건, 찍기로 결정하고 카메라로 프레이밍할 때까지의 그 과정과 그 실감, 그것 뿐이다. 사진의 순기능이 있다면 기억 사이로 흩어져 가는 그 실감을 다시 쥐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내가 응시하면서 썰물처럼 쓸려나간 그날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그 과정에서 재구성이, 어쩌면 왜곡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런들 어떠하리. 애초에 나만의 실감이었으니 아무도 모르고 비교할 원본도 없다. 남는 건 사진 뿐 그로인해 그곳에서 내가 무언가를 느꼈다는 확신.
압도적 이국적 아름다움. 아마 그래서 찍었을 것이다. 사진은 그것을 담지 못했다. 미천한 나의 사진 실력 탓이다. 그러나 찍기로 결정하고 카메라를 들어야만 했던 그 풍경과 감각이 적어도 찍었던 나에게는 남아있다. 사진 작가라면 그것을 사진만으로 전달하겠지. 나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