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가 끝났다. 아침 지하철을 타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연휴 동안은 일을 끝내고 푹 쉬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영원하게 느껴지던 오후만 있던 일요일. 들국화의 음악을 흥얼거렸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제껏 외면해 왔던 것 같다. 신체가 쉬어도 정신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마음이 붕 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쫓기는 것만 같았는데, 내가 내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제야 이에 힘을 풀고 쉬었다 가는 연습을 한다. 침대는 안락하다. 구독자님들도 충분히 휴식하셨는지, 어떤 휴일을 보내셨는지. 잠깐의 평일을 보내고 다시 주말이다.
by 모호
1. 금주의 다큐멘터리
벤 리버스, <보간클로크> by 모호
2. 금주의 음악 앨범
Public Image Ltd. <Flowers of Romance> by 모호
3. 금주의 사진
<알렉스> by 모순
금주의 다큐멘터리
보간클로크
by 모순
제목 보간클로크
감독 벤 리버스
연도 2024
길이 85분
관람 x
문명과 떨어진 스코틀랜드의 어느 산중에서 한 남자가 홀로 살아간다. 그는 작은 집에서 음식을 해먹고, 마당에서 나무를 하고, 숲속에서 스키를 타기도 한다. 은둔자의 삶을 비추는 필름 카메라는 분명 준비된, 그리고 약속된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먼지 때문에 프레임 사이가 보여서일까. 거친 16mm 필름의 질감 때문일까. 남자가 살고 있는 세계는 잘 약속된 또 다른 우주 같았다. 온전한 그의 세계. 내가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세계.
침범할 수 없는 타인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은 흔하다. 요즘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영상원 앞 흡연장이다. 살짝 경사가 있는 길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 따뜻한 해를 쬐며 긴 의자에 앉아 사람을 구경한다. 내가 카메라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마음대로 프레이밍하고 고개를 돌려가며 패닝, 틸팅한다. 내가 정한 구경의 법칙이 있다. 보이는 만큼만 볼 것. 너무 많은 상상은 하지 않고 일단 보이는 것만 본다. 그래야 사진이 된다.
영화 '보간클로크'의 남자를 그렇게 보려고 노력했다. 그가 삶을 보내고, 또 반기는 대로. 의자에 깊숙하게 눌러앉아 느긋하게 다음 컷을 기다렸다. 암스테르담의 어느 오래된 극장이었다. 유독 스크린이 눈이 부셨다. 내가 그의 삶에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빛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6mm 필름을 태우는 빛.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것. 영화가 달려가는 내내 그는 광원인 것만 같았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러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자 축축한 암스테르담과 낯선 언어의 풍경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을 봤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광원.
금주의 음악 앨범
불안
by 모호
트랙리스트
1. Four Enclosed Walls 2. Track 8 3. Phenagen 4. Flower of Romance
5. Under the House
6. Hymie's Him
7. Banging the Door
8. Go Back
9. Francis Massacre
10. Flowers of Romance
11. Home Is Where the Heart Is
12. Another
앨범 Flowers of Romance
아티스트 Public Image Ltd.
발매 1981
길이 48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상황별, 그리고 장소별 음악을 정해두곤 한다. 때와 장소에 맞게 음악을 꺼내들으면 묘한 안도감이 든다. Public Image Ltd.의 세 번째 앨범 'Flowers of Romance'는 그 목록에 있는 앨범이다. 그중에서도 이 앨범의 색인은 '불안'이다. 모호하면서도 공포스러운 그 단어. 형체를 짐작할 수 없는 그것이 올 때 종종 이 앨범을 꺼내 듣는다.
슬플 땐 슬픈 음악을 들을까 밝은 음악을 들을까. 슬픔과 밝음이 반대편에 있는 단어인가. 여러 앨범들이 반례처럼 머리에서 튀어나온다. 슬픔 음악의 스펙트럼이 너무나 넓다. 아무래도 슬픔을 지니고 음악을 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럼 불안할 땐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까. 나는 불안을 불안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편이다. 듣는 불안이 내 안에서 간질거리는 불안보다 더 강렬해서 간지러움이 덜 느껴진다. 불안 앨범의 리스트에는 일관된 음악들이 모여있다.
불안은 상상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불안을 나눠보고 싶다. 불안 클럽을 만들고 싶다. 다같이 모여 각자의 불안을 말하고 불안 음악을 하나씩 골라오기. 각자의 상상을 내어놓고 그것보다 더 불안한 음악을 틀어놓고 시간을 보내면 조금씩 덜어내질 것 같다. 내 불안에만 사로잡히고 싶지 않다. 공감할 순 없더라도 타인의 불안 세계에 접속해보고 싶다. 이곳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불안 클럽에 관심이 생기신다면 연락 남겨주시길 (진담이 섞인 농담입니다).
금주의 사진
알렉스
by 모순
알렉스다. 아이슬란드 이사피오르뒤르에서 처음으로 나를 받아준 마을사람. 서랍 속에 숨겨둔 듯한 그의 모습을 모호순에서 나눈다. 동네 수영장에서 처음 만났다. 알렉스는 리셉션에서 일했다. 그래서 처음엔 나 혼자 멋대로 스위밍가이라고 불렀다. 알렉스가 물었다. 여기는 어쩐 일로. 그는 사진을 전공했다. 그도 필름카메라가 있었다. 우린 금방 약속을 잡았다. 그는 내 두 다리로는 갈 수 없는 곳곳들을 보여줬다. 알렉스는 영화도 좋아한다. 안목도 좋다. 그래서 상영회를 하기 전 나의 작업 모두를 알렉스에게 먼저 보여줬다. 밖을 나오니 밤하늘에 오로라가 있었다. 첫 오로라였다. 우리는 한참을 봤다. 알렉스는 영국인이다. 우리 모두 이방인이었다.
이 사진을 보기 전까지 여러분에게 알렉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영국 청년이 어딘가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림으로써, 그에 대한 나의 고마움을 대신한다. 꿈에도 모를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자기의 모습이 한국어로 소개되고 있다는 걸. 멋지게 인화해서 우편으로 보내야 겠다. 알렉스도 나를 찍었다. 내 사진이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른다. 알렉스도 나처럼 이런 짓을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