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는 불가능하다. 우선 자아는 불명확하고 무한에 가까운 개념이어서, 유한한 언어로 정의하는 경우 필히 왜곡과 축소가 수반된다. 물론 ‘당신에게 필요한 나의 몇 가지 측면들’은 어찌저찌 몇 가지 단어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다. 읽는 대상에 따라 같은 단어도 다른 심리적 이미지이나 개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언어의 특징이다.
따라서 적절한 단어를 선택해서 자기소개를 잘 쓰기 위해선 우선 서로 잘고 있어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대개 자기소개를 요청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먼저 세세히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니 좋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것은 역설의 바다 속에서 적절한 단어를 우연히 낚아 올리는 천운을 바라는 일이 되어버린다.
나는 속세인이니 이렇게 꼬장꼬장하게만 있을 수 없다. 첫 장부터 괜한 관계의 부스러기를 만드는 건 나중에 더욱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린다. 처세술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모르니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기소개를 말미암아 상황적 맥락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쓰는 것이다. 나는 이 장소에서, 이 시기에서, 이 관계 속에서, 이 규범 안에서 어떤 필요로 인해 이 사람과 어떤 대화 물꼬를 틀어볼 것인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 영화는 배우가 아닌 일반 파리인들의 삶을 시네마 베리테로 보고자 한 새로운 시도로 이뤄졌다.”
세 사람이 앉아 있다. 두 사람은 감독 그리고 한 여성. 인류학자 장 루슈가 말한다. “카메라를 앞에 두고 사람들이 대화하게 하자”. 여자가 답한다. “카메라가 신경 쓰일 것 같아서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이 거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담은 영화에요.” 여자는 프랑스의 거리로 나간다. 1960년 파리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이어서 카메라는 파리인들의 하루, 고민, 대화, 휴가, 그들의 일상을 따라간다. 카메라는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의 만남을 촉발하기도 한다. 소형 카메라와 소형 동시녹음기의 개발 덕분이다.
'영화 진실'로 번역되는 '시네마 베리테'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사용되었다. 영화가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감독은 시사회를 연다. 지금까지의 편집본을 영화에 출연한 모든 파리인들과 함께 본다. 한 아이가 말한다. “찰리 채플린 영화보다 재미없어요.” 사람들은 웃는다. 아이스브레이킹은 끝났다. 한 남자가 말한다. 카메라 앞에 있으니 모두가 유식한 단어를 고르며 젠체한다고 한다. 또 누가 말한다. 너무 사실 같아서 혼잣말을 하는데 우리가 끼어든 것 같은 당혹스러운 느낌이 있었다고. 진실이다. 진실 같았다. 거짓이다. 연기다. 출연한 모든 이가 저마다의 감상을 말한다. 두 감독은 시사회가 끝나고 영화를 스스로 평가한다.
영화가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영화 진실이란 영화 관람 후 영화가 각자에 남긴 것에 있지 않을까. 영화가 내게 남긴 실감 적어도 그것만은 각자에게 진실일 것이다. 이 개별적으로 온전한 감각을 누군가에게 다시 전하려 할 때, 또다시 누군가는 그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는 이상하게도 언어의 한계를 다시 느낀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는 1961년에 다큐멘터리가 영원히 안고 갈 거의 대부분의 모든 문제를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금주의 음악 앨범
편지
by 모호
트랙리스트
1. A Song for You 2. Top of the World 3. Hurting Each Other 4. It's Going To Take Some Time
5. Goodbye to Love
6. Intermission
7. Bless the Beasts and Children
8. Flat Baroque
9. Piano Picker
10. I Won't Last a Day Without You
11. Crystal Lullaby
12. Road Ode
13. A Song for You (Reprise)
앨범 A Song For You
아티스트 Carpenters
발매 1972
길이 37min
스트리밍 모든 플랫폼
편지같은 앨범들이 있다. 마치 한 인물에게 고이 접어 보내는 듯한 음악들. 넋두리가 아니라 꾹꾹 눌러 쓴 멜로디와 가사를 가진 음악들. 그런 앨범을 만나면 나는 발신인이 되기도, 수신인이 되기도 한다. Carpenters의 A Song For You가 그렇다. 편안한 멜로디에 담긴 편지 같은 앨범. 나는 이 앨범을 잊을만 하면 꺼내어 듣는다.
편지를 쓰는 일을 어려워 했다. 문체를 고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너에게 말하듯이 써야할까. 읊조리듯 써야할까. 어느 방식이든 마음을 전달하기에는 나의 언어가 모자라서 나는 이리 쓰고 저리 쓰며 편지의 초안을 미리 썼다. 두 번의 퇴고. 원고지에 편지를 쓰곤 했었다. 원고지의 칸에 글자를 하나씩 적어 넣을 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글자들이 모여 단어가, 그리고 문장이 될 때 마음이 완성되는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편지의 초안을 쓰지 않게 되었다. 아마 엄마의 편지를 훔쳐 읽고 난 뒤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가 아빠에게 보낸 편지. 아마 누나가 태어났을 때, 나는 아직 없었을 적 겨울의 편지. 펑펑 내리는 눈과 사랑에 대한 고백, 추신으로 빌렸던 비디오를 반납했다는 짧은 편지는 미끄럽고 부드럽게 나에게 들어와서 오래 머물렀다. 그 뒤로부터 나는 엄마의 편지를 베낀다. 나는 오늘 무얼 했어.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해. 엄마의 편지를 빌어 마음을 얘기하곤 했다. 나의 편지 문체는 엄마의 그것과 비슷해졌다.
한번은 오래 된, 내가 초등학생일 때에 받았던 편지를 발견한 적이 있다. 학준이였나. 짧은 스포츠 머리에 테가 얇은 안경을 쓰고 있던 아이였다. 편지에는 그 해의 크리스마스 씰이 붙어있었다. 씰이 반듯하게 붙어 있지 않아 언짢아했던 당시가 떠올랐다. 편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건강해. 친구가 되어줘 고마워. 나는 그 마음을 훔치기로 했다. 아니, 내가 받은 편지이니 간직하기로 했다. 편지는 받은 사람의 것. 더는 문체를 신경 쓰지 않아야겠다. 원고지 사용법을 신경쓰지 않아야겠다. 가끔은 내것이 되지 않을 글을 써야겠다. 훔친 엄마의 편지와 더는 내 손에 있지 않은 보내진 편지들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 주 가사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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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사진
작업실 가는 길
by 모호
작업실에 가는 길은 40분이 족히 걸린다. 집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버스에 오르고 바깥을 외우고 얕은 잠에 들고. 매번 내려야 하는 정류장을 헷갈려서 잔뜩 긴장하고. 그러고 내리면 넓은 횡단보도와 공중에 떠 있는 길이 있다. 그 길 밑을 걷다가 나도 공중으로. 꽃상가를 거치면 단단한 인상의 컨테이너가 있고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의 정면의 내 자리. 열쇠를 한쪽에 걸어두고 노트북을 연결한다. 잠시 앉아 생각을. 아무런 도움없는 생각을. 이제 할 일을 해야지. 오늘 할 일을 해야지. 작업실 가는 길은 그렇다. 차곡차곡 시작하는 길. 얕은 꿈을 꿨다가 퍼뜩 돌아오는 길. 나는 그 길을 온통 느끼지만 느끼지 못했다. 초록불이다, 달려야지. 내일도 나는 얕은 꿈을 꿀 것이다.